나의 인생은
[ フィクション - スキマスイッチ ]
Null.
일단 니체는 아니다.
I.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른다. 알았으면 진즉에 반쯤 죽여놨을 테니까.
내 명함 구석에는 한울 은행의 로고가 박혀있다. 누군가에게 이 명함을 건네줄 때마다, 나는 크고 작은 족쇄가 여기 묶여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내 인생의 절반 정도가 손톱만 한 로고 아래에서 썩어 간다. 그렇지만 썩어가면 갈수록 월급도 오르니 꼭 불평할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묶여있다는 기분은 지울 수 없지만.
내 명함은 아메리칸 싸이코에 나오는 그것처럼 대단한 것이 못 된다. 평범한 재질에 평범한 폰트에 싸구려 잉크로 찍어낸 물건이다. 처음 명함을 받은 것은 신입사원 교육 직후였다. 앞으로 많이 쓰게 될 거라면서 사수가 몇 통 만들어주었다. 이후로 진급할 때마다 직책이나 부서 따위가 바뀐 명함을 한 통 받았다. 명함을 새로 파는 것은 회사에서 비용처리 해주었다. 내가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었다. 족쇄를 새로 만드는 데 노예가 돈을 낼 수는 없으니.
입사 동기들은 대부분 회사에서 만들어주는 표준 양식의 명함보다는 따로 주문해서 만든 명함을 사용하는 편이다. 금박에 양털 같은 걸 쓰지는 않지만, 더 나은 재질과 디자인의 명함이다. 같이 술을 마실 때, 녀석들은 “사회에서는 명함이 네 얼굴이라니까?” 하고 말을 한다. 나는 이 친구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아, 한 단어만 빼고 말이다. 사회에서는 명함이 내 신분이다. 그리고 이 신분은 명함의 재질이나 디자인 따위에서 오지 않는다. 명함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신분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신분은 외거노비外居奴婢다.
평소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나는 명함 쓰는 일이 별로 없다. 정말 필요할 때 외에는 별로 명함을 주고 싶지 않다. 내가 주는 명함을 받을 때 상대방의 두 눈에 스치고 지나가는 눈빛이 너무 끔찍하다. 가령 동창회에서 명함을 돌리거나 소개팅에서 내 직업을 밝히고 나면, 그들 눈에 분명하게 흘러가는 눈빛이 있다.
아, 돈 많이 벌겠구나.
그따위 부러움이 눈 속에서 일렁거린다. 속물적이라고 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 앓는 속도 모르고 마음 편하게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고 있자면 욕지기가 치오른다. 그런 ‘동경하는’ 눈빛을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되도록 명함을 돌리지도 직업을 밝히지도 않으려 하는 것이다. 덕분에 회사에서 받은 명함은 다 써본 적이 없을 지경이다.
확실히 그들 생각대로 은행원이라는 직업은 돈도 많이 벌고, 해고될 걱정도 별로 없다. 안정된 직장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던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다. 훨씬 반짝이고 생기 넘치는 것이었다. 하긴, 내가 누굴 탓할까.
나는 부모가 만들어놓은 선로를 그저 무비판적으로 따라왔을 뿐인 멍청이다. 동네 중학교, 좋은 고등학교, 뛰어난 대학교, 훌륭한 직장. 겉으로 보기에는 엘리트 코스를 제대로 걸어온 탄탄대로의 인생이다. 그렇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어중간한 중구난방에 지나지 않는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전교에서 놀았지만, 고등학생 때는 만화가가 되고 싶어 자퇴까지도 진지하게 고려해보았다. 하지만 “만화로는 벌어먹을 수 없으니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는 게 어떻겠니.”라는 부모님과 담임의 설득에 하는 수 없이 공부로 돌아왔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책을 봐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게 별로 없었다. 대학은 턱걸이로 들어갔다.
만화 창작 동아리에 대학 생활을 바치고 싶었다. 전역하고 나니 바닥 치는 학점 복구가 우선이었다. 부모님과 담임의 설득대로 만화로는 벌어먹기 힘들 거 같은데, 학점도 이 모양이면 앞으로의 살길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만화를 그릴 때보다 더 격렬하게 공부했다. 겨우 3.8에 맞춰놓고 졸업했다. 구직생활 1년 만에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이후 몇 년간 정해진 일정대로 살았다. 와콤 타블렛 잡아본 지가 언젠가 싶다. 그렇지만 내가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아아, 나에게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괴롭더라도 충실한 나날을 고를 용기가 있었더라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매일 고객들에게 인사만 하다 보니 벽에 붙은 포스터에게까지 머리 숙이는 일 따위 없었을 것이다. 와이셔츠에 슈트 차림은 익숙해졌다. 그렇지만 뜨거웠던 열정은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안정된 생활을 얻긴 했지만 이건 아닌 거 같다.
아닌 거 같아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게 또 인생이기는 하지만.
II.
명함을 건넬 때마다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그들은 은행원이라면 돈도 많이 벌고 일찍 퇴근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무근이다. 아, 물론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사실이다. 같은 시기에 졸업한 나의 친구들과 비교해도 나는 꽤 버는 축에 속한다. 하지만 일찍 퇴근한다는 오해는 좀 반박하고 싶다. 내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점심시간 없이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논스톱으로 일하고, 그 뒤로는 퇴근해버리는 줄 아는 사람이 꽤 있다. 우리가 점심시간에도 문 닫지 않고 영업하기 때문이다.
우선 네 시에 영업을 마친다고 퇴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업과 잔업이 산더미라서, 여섯 시 쯤에야 퇴근할 수 있다. 일이 평소보다 많거나 특히 마감날이면 야근도 불사해야 한다. 다른 회사에서는 밥먹듯 야근한다고 지적하면, 딱히 할 말 없지만.
또 한 가지, 은행원의 점심시간은 2교대로 이루어진다. 반반으로 나눠서 한 시간씩 식사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는 경우를 나는 본 적 없다. 일반적인 직장인들 역시 비슷한 시간에 점심시간을 가지기 때문이다. 여섯 시에 퇴근하고 나서는 너무 늦다. 때문에 이 시간대에 직장인들이 몰려든다. 직원은 반절이 사라지는데, 고객은 세 배로 많아진다. 죽을 맛이란 소리다. 보통은 30분도 안 되어 식사를 마치고, 이 닦고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지점 안에 식당이 따로 있는 곳도 있지만, 내가 근무하는 곳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근처 식당에서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
그날도 잽싸게 겉옷을 챙겨 근처 분식집으로 향했다. 경험상 이 근처 식당 중에서 김밥만큼 빠르게 나오는 음식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식당의 문을 열자, 주인장께서는 주문을 받기도 전에 알아서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뒤늦게 ‘늘 먹던 거?’ 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시켜놓은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밥이 나오면 기계적으로 씹어넘긴다. 집고 넣고 씹고 삼킨다. 그렇게 참치 한 줄과 소고기 한 줄이 나왔다가 사라진다.
나는 금방 자리로 돌아온다. 고객을 대하는 것도 김밥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고객에게 인사하고, 어떠한 용건인지를 물어본다. 용건을 처리하는 사이사이에 관련 상품을 설명한다. 어찌 되었던 은행원도 실적으로 좌우되는 직업이니까. 은행 어플 설치도 권유한다. 요즘은 어플의 설치도 인사고과에 포함된다. 이 짓을 아침부터 해 떨어질 때까지 계속한다. 덕분에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퇴근하고 나면 차를 몰고 여자친구를 마중 나간다. 다른 회사는 문화가 있는 금요일이라고 훨씬 일찍 퇴근시켜주지만, 여자친구가 다니는 곳은 규모가 작은 기업이라 야근 않고 퇴근시켜주는 정도에서 타협해야 했다. 사실 그게 어딘가 싶다. 우리 커플은 그 정도도 감지덕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의 회사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똑같은 풍경이다. 동작대교를 타고 넘어와 서초 근방에서 여자친구를 태운다. 길이 막히지 않아 더 빠른 길이 있다고 해도 경로를 바꿀 거 같지는 않다. 그냥 같은 풍경이 똑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게 좋다. 안심이 된다고나 할까. 지금 여자친구와는 몇 년을 사귀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한 게 별로 없다. 심지어 조수석의 문을 열면서 하는 인사 그 말투까지도 그대로다.
“아고, 힘들다!”
“오늘 하루도 고생했으.” 우리 대화는 늘 이렇게 시작한다. 사전에 합을 맞춘 겨루기처럼. 절대 서로를 상처 주지 않는다.
미리 알아둔 맛집을 찾아가고,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간다. 동거하고 있기에 그녀의 집이 곧 내 집이었다. 잠들기 아쉬워 해묵은 영화를 틀어놓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배경으로 우리는 섹스한다. 서로의 손으로 서로의 옷을 벗어 던진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핥고, 유두를 깨물고, 빨듯이 아래로 내려간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지만 콘돔은 반드시 착용한다.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덜컥 애부터 생겨버리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콘돔에 윤활제 같은 게 묻어있어서 삽입은 수월하다. 기본적인 정상위에서 시작해 꿀 꽈배기와 흔들 다리를 건너고, 도기 스타일로 넘어갔다가 기승위에서 사정한다. 체력이 좀 남으면 도자기 자세까지 가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기승위에서 끝난다. 좀처럼 이 루트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정하고 나면 축 늘어진다. 고추도 늘어지고 내 몸도 늘어진다. 그래도 자기 전에는 씻어야 한다. 여자친구와 함께 씻고 잠자리에 눕는다. 그녀가 나의 왼쪽에, 내가 그녀의 오른쪽에 자리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에게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기진맥진한 채로 잠든다.
그런데 만화는 언제 그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