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laide Shakespeare
[ There is no escape from the GuestHunter ]
Null.
“계획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없다.”
- 에이든 A. 블레어
I.
런던에서 유학하던 때 난 거지였다. 비유나 과장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놀고 마시느라 한 학기 생활비를 일주일 만에 탕진했고, 잦은 외박에 쫓겨나다시피 기숙사를 나와야 했다. 유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는 단칸방 하나 잡기도 어려웠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했지만, 나는 그런 걸 할 만큼 성실하지 못했다.
대신 넉살은 참 좋았다. 배고프면 지나가는 교수님 붙잡고 밥 한 끼 얻어먹었고, 밤이면 동기들 자취방에 빌붙어 잠을 잤다. 처음엔 다들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내 연락을 받지 않기 시작했다. 문전박대당하는 나날 끝에 나는 모두로부터 고립되었다. 단절되어버렸다. 그게 유학 첫 해의 봄이었다.
런던의 봄은 따듯해 노숙도 할 만했다. 해 떨어지면 잔뜩 취한 채 하이드 파크로 숨어들었다. 그곳 잔디밭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곧잘 올려다보았다. 매일 보는 밤하늘인데도, 그 풍경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세상 모든 진리가 다 내 것 같았다. 그래서 연구도 공부도 빈둥빈둥하며 보냈다. 제때 일어나는 법이 없고, 제때 등교하는 법이 없었다. 실험보다는 노숙자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들이 씻지 않으니 나도 씻을 이유가 없었다. 빨래 할 돈도 아까워서 나는 늘 악취를 달고 살았다.
“어우, 이게 무슨 냄새야?”
“아스컹크 들어왔나보다.”
“수업도 빠지는 놈이 뭐하러 연구실에는….”
내가 연구실 문을 열면 곳곳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판에 박은 듯 한결같은 반응이라 딱히 상처를 받거나 하지는 않는다. 아스컹크라는 별명에도 익숙해져버렸다. 원래는 아시안 스컹크였지만, 부르기 번거로웠는지 언젠가부터 짧게 줄어들었다. 어느쪽이든 자랑스러운 별명이 아니겠지만. 이 시기 연구실과 그 주변에서 내 평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내 처지를 딱하게 여겨 도움의 손길을 내어준 사람이 바로 셰익스피어 교수였다. 당시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거라곤 남미 역사에 정통한 고고학과 교수라는 것 정도. 사실상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뜻밖의 호의에 얼떨떨해하던 내게 피스마이어 교수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라…. 고고학 연구에 몰두해 세계 곳곳을 쏘다니다가 혼기를 아주 크게 놓친 40대 초반의 전형적인 노처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좋을 걸세.”
피스마이어 교수는 사람 좋은 것과 별개로 꼰대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양반이었으나, 셰익스피어 교수에 대한 그의 설명은 딱히 틀렸다고 하기 어려웠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는 골드미스였다. 그뿐만 아니라 결혼 걱정 없이 남자를 갈아치우는 여자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젊은 유학생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인다? 여기에는 단순한 호의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는 저택 같은 이층집에 혼자 살았다. 하지만 따로 게스트룸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1층의 소파를 침대처럼 써야 했다. 키에 비해 소파가 작아 잔뜩 웅크린 채 자야 했지만, 하이드 파크의 이슬 젖은 맨땅보다야 백 배 나았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와 나는 여러 방면에서 잘 맞았다.
생활이 안정되니 다른 것들도 잘 풀리기 시작했다. 밑바닥이던 평판도 조금씩 회복되었고, 연구 성과도 괄목할만했다. 덕분에 석사 학위도 어렵지 않게 취득할 수 있었다. 내가 셰익스피어 교수를 굳이 은사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입었다.
“너랑 그 교수랑 도대체 무슨 사이야? 둘이 사귀는 사이 맞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말을 지금 우리가 믿을 거 같냐?”
“이 정도 물어보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대답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동기들 사이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결론이 났고, 확인차 물어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릴 때면 그들은 열댓 쌍의 눈깔을 부라리며 나를 밀어붙였다. 바른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꽐라를 만들어서라도 알아내겠다는 눈빛이었다. 술이 마시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로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야 모르는 걸 대답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앞뒤 맥락 다 자르고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우리는 단순히 집주인과 세입자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교수는 2층에서 그녀만의 삶을 살았고, 내가 있든 말든 상관없이 남자를 즐겼다. 우리는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했다. 남자와 뒹굴 때면, 그녀의 신음으로 이층집이 떠나갈 듯했지만 나는 모른 척 자는 척으로 일관했다.
그렇다고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우리는 늘 함께 주말을 보냈고, 한가할 때면 둘이서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녀의 주량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많지 않아서, 자연스레 내가 그녀를 상대하게 되었다. 기분 내킬 때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는 내게 키스했는데, 혀 놀림이 환상적이라는 사실만 기억난다. 우리는 단지 몸을 섞지 않을 뿐이었다.
객관적인 사실만 따진다면 우리는 연인 미만 친구 이상의 애매한 관계였다. 나는 그걸 플라토닉 러브라고 생각한다. 육체적으로는 다른 남자들과 뒹굴어도 정신적으로는 오직 내게만 의지하는. 그녀는 우리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어볼 기회는 많았는데, 실제로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물어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뭐라고?” 잘못 들었나 싶어서 내가 되물었다.
“인터넷 상태가 별론가. 국제전화로 할 걸 괜히 스카이프 썼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귀 열고 잘 들어, 이 친구야. 셰익스피어 교수가 돌아가셨어.”
기네스로 저녁을 때운 채 책상머리에 앉아 단편 원고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힘들지만 즐거운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에 뜬 이름은 야니 모(Yonnie Mao). 영국 유학 시절 알게 된 실험실 동기였다. 기쁜 마음에 곧장 전화를 받아들었다. 그러나 통화 내용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 교수가 죽었다.
영국을 떠난 이후에도 나와 그녀는 정기적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때로는 전화였고 보통은 엽서였다. 그런데 요 몇 달 그녀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엽서는 답장이 없었고, 전화는 받지를 않았다. 예감이 불길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가셨을 줄이야….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 때문에 학교가 떠들썩해. 물론 학부생들은 잠정 휴강이라 좋아하는 눈치지만.” 야니가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에 좋아하는 눈치라니, 농담이라도 기분 나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좀 이따 내가 다시 전화해도 될까? 지금은 좀 바빠서….”
“니가 바쁠 일이 뭐가 있냐. 펑펑 울고 싶다고 해 그냥. 하여튼 나는 오후 내내 스케줄 비어있으니 아무 때나 전화해도 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열두 평 남짓한 나의 자취방에는 한참 전부터 적막만이 가득하다. 무언가 혼잣말을 하기 위해 입을 살짝 열었다가, 그냥 다시 닫았다. 목이 메어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다. 함부로 단어들을 토해냈다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야니는 내가 울고 싶어하는 줄로 알았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밤은 너무나도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