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laide Shakespeare
[ There is no escape from the GuestHunter ]
ll.
뻐꾸기가 두 번 울었다. 그 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방 안 풍경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혼자 사는 방이니 달라지지 않는 게 당연하지만,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이 내 숨통을 옥죄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다섯 개 남은 맥주캔 중에 하이네켄 하나를 꺼내서 단숨에 들이켰다. 맥주는 쓰고 달았다.
침묵 속에서 나는 홀로 고독했다. 좁은 골목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도 오늘은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물러나고 있고,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요한 밤이었다. 빈 맥주캔을 찌그러트릴 때도 소리는 멀고 이질적이었다. 나는 맥주 한 캔을 더 마신 후 자리로 돌아왔다. 공복에 맥주 세 캔이라 취할 법도 한데, 오히려 정신은 더욱 또렷해질 뿐이었다.
나는 의자에 눕다시피 등을 기댄 채로 생각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홀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나를 붙잡아주고 아껴주었던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한 기억은 아름다웠지만, 옛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돌덩이 같은 게 가슴팍을 짓누르는 듯했고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전화고 뭐고 이대로 그냥 자버릴까.”
피곤하다. 시간이 늦기도 했지만, 워낙 갑작스레 그런 이야기를 들은 탓에 심적으로 힘들었다. 여기에 단편 작업하던 피로가 겹치면서 당장에라도 쓰러져 잠들어버릴 거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이 모든 게 꿈이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올까.
설령 돌아온다 하더라도 아직은 잠들 수 없었다. 야니에게 전화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우와, 타이밍 기막히네. 안 그래도 도로가 꽉 막혀서 심심하던 중이었는데.”
“지금 퇴근 시간이야?”
“그렇지. 여긴 여섯 시 반 조금 넘었으니까.”
“운전하면서 전화해도 돼? 위험하지 않나. 이따가 다시 전화할까?”
“블루투스 핸즈프리라서 괜찮아. 하도 길이 막혀서 운전하는 거 같지도 않고.” 야니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말했다.
“셰익스피어 교수가 죽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너 프랑스 살잖아.” 내가 물었다.
“우리 학교 커뮤니티 어플 있잖아. 거기 게시판에 사진 몇 장이 올라왔더라고. 관리자들이 금방 글 내리긴 했는데, 그 전에 운 좋게 봤지.”
그런 어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2달러 정도 했던 거 같은데, 먹고 살기도 힘든 까닭에 다운받지는 않았다. 그런 어플 살 돈 있으면 차라리 김밥 한 줄 더 먹고 말지.
“그 사진이 셰익스피어 교수의 사진이었던 거고?”
“게시한 사람은 그렇다고 하는데, 사진만 봐서는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피스마이어 교수님께 전화해서 물어봤거든? 근데 맞다고 하시더라.”
“…나도 그 사진 좀 볼 수 있을까. 꼭 좀 보고 싶은데.”
“괜찮겠어? 네가 보면 좀 그럴 거 같은데. 이게 네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 교수랑 한두 번 만나본 게 전부지만, 넌 아니잖아.”
“혹시 모르잖아. 내가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가 아닐 수도 있잖아. 전혀 이상한 사람이 죽은 거일 수도 있잖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죽은 거면 네 마음이 편해지는 거냐.” 그녀의 질문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는지 야니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예전에 쓰던 이메일 주소 아직 살아있어?”
“뒤에 @me.com으로 끝나는 거 말하는 거지? 아직도 쓰고 있어.”
“그쪽 계정으로 사진 보내줄 테니까 잠깐 전화 좀 끊을게. 사진 보고 나서 내 탓 하지 마라.”
“내가 왜 네 탓을 하겠니.”
거기서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야니의 메일을 기다렸다. 메일은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본문은 없고 사진 몇 장뿐. 나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파일을 열어보았다. 성급하게 사진을 확인한 것에 대해 나는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내 변변치 못한 상상력을 아득히 초월하는 참혹한 광경이 거기엔 있었다. 아무리 시체라고 해도 몸의 형체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사진 속에는 하반신 하나 덜렁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절단면이 굉장히 이상하다. 옆구리에서 배꼽을 지나 다시 반대쪽 옆구리까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깔끔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나는 낙담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나머지 사진도 확인해보았다. 야니가 보내온 사진은 모두 다른 방향에서 찍은 하반신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로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던 도중 문득 절단면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감적으로 뭔가를 발견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뒤숭숭한 마음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며 사진을 살피고 있는데, 야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좀 괜찮냐?”
“아니, 괜히 본다고 한 거 같아….”
“난 분명히 내 탓 하지 말라고 했다. 보면 안 될 거 같다고 경고도 했다!”
“알아. 네 탓할 생각도 없고.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상체는 어떻게 된 거야?”
“없어졌어. 경찰도 못찾았다고 하더라.”
“그럼 이게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의… 라는 건 어떻게?” 시체라는 표현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글쎄, 거기까지는 안 물어봤는데. 아마 현지 경찰이 유전자 검사했겠지. 지금 멕시코 경찰 무시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듣기로는 셰익스피어 교수랑 같이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사라졌대. 지금까지 딱 두 명 찾았는데, 그 사람들도 제정신은 아니라더라.”
“미쳤다는 뜻이야?”
“그럴걸. 잠도 안 자고 계속해서 Serpiente plateada라고 중얼거린다던데, 스페인어로 은빛 뱀이라는 의미인가 봐. 어쩌면 은빛 악마일 수도 있고. 현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더라고.” 야니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무언가 떠오른 게 있었다.
“그거 아마 뱀이 맞을 걸.”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뭔가 아는 거야?”
“확실하진 않지만 짚이는 데가 있어서. 잠깐 끊지 말고 있어 봐.”
영국을 떠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지만, 나와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는 정기적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때로는 전화였고 보통은 엽서였다. 해외로 탐험을 나갈 때마다 그녀는 그림엽서에 빼곡히 근황을 적어 내게 보내왔다. 가끔은 이러한 유적지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 뒤에 몇 자 적어 보내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나를 생각해주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엽서와 사진 전부를 하나 빠짐없이 앨범에 모아두었다.
나는 올해 받은 엽서를 전부 꺼내어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이 엽서 중 어딘가에 ‘Serpiente plateada’에 대한 힌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는 그 성격만큼이나 필체가 거칠었고, 때문에 영어와 스페인어를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야, 뭐 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냐.”
“은빛 뱀 찾느라. 지금부터 뭐 하나 읽어줄 테니까 잘 들어봐.” 나는 찾아낸 엽서 하나를 또박또박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아르덴 베이커에게,
저는 지금 멕시코에 와 있습니다. 한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무척 덥고 습합니다. 날벌레가 기승을 부려 조금 힘들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굳이 엽서를 다 읽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사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앞부분을 빠르게 넘기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종래 아스테카 문명에서 볼 수 없었던 겁니다. 은빛 비늘을 가진 뱀에 대한 것인데, 제 생각에는 시우코아틀의 반대되는 속성의 신인 것 같습니다. 달을 상징하고,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입니다. 나우아틀어로 이름 지으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줄여서 이스탁코아틀Iztac Coatl이라 명명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Serpiente plateada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듯합니다.
(중략)
한밤중에 사원 쪽에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도대체 저 아래에는 뭐가 있는 걸까요.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제게도 고고학자 특유의 모험심이 있나 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저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집니다. 벽화의 보존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직접 지하에 내려가 볼 생각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상한 소리의 정체를 확실히 밝힐 수 있겠죠. 밤이 깊어 이만 줄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은빛 비늘을 가진 뱀’이 셰익스피어 교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살해한 게 아닐까.” 내가 말했다.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내가 보내준 사진은 벌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거야? 셰익스피어 교수의 시체는 절단되어 있었잖아.”
“그게 뭐 어쨌는데.”
“뱀은 먹이를 베어 물지 않는다고. 단번에 삼켜버리지. 게다가 뱀은 발성 기관이 없어서 쉭쉭 거리기만 할 뿐이야. 그분이 돌아가셔서 상심한 건 알겠는데 쓸데없는 추리일랑 하지도 말고 범인 잡는 건 경찰한테 맡겨.”
“…알았어. 하, 일단 자야겠다. 끊을게.”
“잠깐, 잠깐만! 몇 주 정도 뒤에 교수님 장례식이 있을 거야. 혹시 올 수 있어?”
“돈 없어.”
“아스컹크가 돈 있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지. 오고 싶기는 해?”
“그야 물론이지.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럼 와. 표는 우리가 준비해줄게.”
“우리?”
“피스마이어 교수님 연구실 동기들. 너 빼곤 다 성공했으니까.”
성공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 어떤 기준으로도 난 실패한 사람이다. 나도 인정한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지 실패한 건 아니려나….
“하여튼 끊을게. 나중에 봐.”
한때 실험실의 동기들과는 더 안 좋을 수가 없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관계라 생각했다. 지금 내가 동기들과 잘 지내고 있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 덕분이다.
이제는 동기들이 그녀의 마지막에 나를 초대하려 한다. 그녀가 살아생전 쌓은 덕이 돌고 돌아서 나를 그녀에게로 불러주는 것인가.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 전에 서둘러 잠을 청했다. 그러나 나는 밤새도록 뜬눈으로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