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laide Shakespeare
[ There is no escape from the GuestHunter ]
lll.
인생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간절히 원하는 건 이루어지는 법이 없지만, 신경 끄고 있는 사이에 저절로 구색이 갖춰는 경우도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라면, 지금이 딱 그렇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자취방에 처박혀 단편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 만난 메스티소(mestizo) 사내와 함께 멕시코시티에서 한참 떨어진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 스무날 정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비 오는 날, 셰익스피어 교수의 장례는 치러졌다. 대학 관계자와 고고학회 관계자, 그 외 여럿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첫 삽의 영광을 내게 주었다. 나는 한 삽 가득 흙을 퍼서 그녀의 관 위를 덮어주었다. 살아서 고생했으니 죽어서 편안하기를. 신을 믿지 않으니 그런 식의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삽을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흘렀다. 흐르다 못해 펑펑 쏟아졌다. 결국, 장례가 끝나고 나는 기진맥진해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얼른 호텔로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가던 길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피스마이어 교수 실험실 동기들이 나를 납치한 것이다. 납치는 아주 단호했고, 또한 신속했다. 그들은 런던 중심부의 작은 펍으로 나를 끌고 갔다. 20세기 초반의 재즈 음악을 틀어주는 곳. 학창시절 자주 들락거리던 펍 중 하나였다. 몇 년 만에 왔는데도 주인은 나를 알아보았다. 주문하기도 전에 늘 마시던 기네스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눈물범벅의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맥주잔을 잡았고,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의 안식을 위해 건배했다. 눈물 섞인 기네스는 맛없었다.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기억은 딱 거기서 끊겨있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속이 결딴나있었던 거로 보아 분위기에 편승해 닥치는 대로 마셨던 것 같았다. 어떻게든 해장을 하지 않으면 온종일 괴로울 거 같아서, 나는 미리 챙겨온 컵라면을 끓였다. 속이 안 좋아서 면은 먹지 못하고 국물만 홀짝였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들어오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어이구, 시원하다으아읏깜짝야!”
방에 비치된 전화기가 울렸다. 타이밍이 너무 뜬금없기도 하거니와 벨소리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라면 국물을 바닥에 왕창 쏟았다. 침대에 쏟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나는 전화기 쪽을 쳐다보았다. 모닝콜을 신청했나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애당초 필름이 통째로 끊겨나갔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고객님. 영국 고고학회에서 전화가 와 있습니다. 연결해드릴까요?”
“누가 누구한테 전화했다고요?”
“그분은 영국 고고학회 사무처장이라고 말씀하셨고요, 아르덴 베이커 씨와 꼭 좀 통화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왜 저랑 전화를?”
“글쎄요. 그건 고객님께서 직접 전화를 받아 물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영국 고고학회의 사무처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나를 찾는 걸까. 나는 의아한 마음을 숨기며 “연결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연결은 즉각적이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영국 고고학회의 사무처장 이노어 델핀저라고 합니다. 아르덴 베이커 씨 맞으십니까?”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샘솟았지만, 나는 꾹 참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르덴 베이커는 내 이름이 아니다. 영국에서 유학하던 당시 동기들이 나를 불렀던 별명 중 하나이고, 이후로 쭉 내 필명이었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가 엽서에서 나를 아르덴 베이커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네, 제가 아르덴 베이커입니다.”
“어제 셰익스피어 교수의 장례식에서 잠깐 뵈었는데 기억하시는지요.”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노어 델핀저의 ㅇ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라고 말하기도 거식하거니와 사회생활에는 나름의 처세술이 필요한 법이다.
“해머즐리 씨로부터 이야기 들었습니다. 멕시코시티에서의 세미나에 셰익스피어 교수의 대리로서 참가하기를 희망하신다고요.”
“…예?”
갑작스러운 발언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한국어로 되물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그걸 Yeah라고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침묵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었다.
“아, 정말 다행이지 뭡니까.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겨서 이것저것 곤란했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지 도통 모르겠는데요.”
“당연히 세미나 이야기죠. 알렉스 해머즐리 씨는 알고 계시죠?”
“셰익스피어 교수님의 조교수를 하고 계시는 분이라서 어느 정도 안면은있습니다.”
“원래는 셰익스피어 교수 대신에 그분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늦게 연락이 왔어요. 대리인 적임자가 영국으로 돌아왔다고 말이죠. 베이커 씨도 수락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제 술자리에 해머즐리 씨가 왔었나? 납치 일행에는 없었지만 나중에 합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내 취중 결정을 번복하고 싶지 않았다. 멕시코시티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내 지갑에서 돈이 나가는 거였다면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나는 거지 뺨치게 가난하니까. 하지만 비행기 표에서부터 체재비까지 전부 학회에서 지급하게 될 것이라고 이노어 델핀저는 내게 설명했다. 거절할 이유와 명분이 딱히 없었고, 가고 싶은 이유와 명분은 산더미였다.
“런던이 아니라 인천에서 출발하는 표를 예약해주셔야 합니다.”
노파심에 나는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남의 돈으로 비행기 타고 멕시코시티로 오게 된 것이다.
세미나는 어제부로 모두 끝났다. 여남은 행사에는 딱히 참여하고 싶지 않았고, 참여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일정 없이 텅 비어버린 시간이 약 나흘 정도. 나는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가 숨을 거둔 곳, 바로 그 사원에 가보고 싶었다.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위치는 대강 파악했다.
그러나 사원 근처까지 가는 차편이 멕시코시티에는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버스를 갈아타다 보면 갈 수 있다고 버스터미널의 여직원은 내게 설명해주었지만, 가는 데 한 세월 오는 데 한 세월이었다. 국제 면허는 커녕 면허 자체가 없으니 차를 렌트할 수도 없다. 근처 마을로 향하는 차를 히치하이킹 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운전석의 메스티소 사내와는 그러다 만나게 되었다.
사내는 사원 근처의 작은 마을에 살며, 멕시코시티에는 생필품을 사러 왔다고 했다.
“그래나서 그이 사원엔 무신 볼일이요? 관광은 아인드 시픈데.”
“아는 분께서 거기서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샤고? 아, 호리거 앵국에서 오신 야쁘장한 선상님 마라는 가?”
대학교 다닐 때 스페인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졸업하려면 외국어 교양을 하나 들어야 했는데, 스페인어를 고른 것은 순전히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때 재미 붙여서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지금까지도 일상회화 정도는 무리 없이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내의 뉴스페인 사투리는 그정도 수준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귀에 걸리는 단어 몇 개로 대충 의미를 때려 맞추며 사내와 대화를 이어갔다.
“영국에서 오신 예쁘장한 분이라면, 아마 맞을 겁니다.”
“그라매 혹 비애커라는 양반 아시오?”
“베이커라면, 접니다만?”
내 말에 사내는 깜짝 놀란 듯했다. 그는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감탄과 놀라움을 동시에 표했다.
“오메야! 시상 참 좁구마이. 비애커라매 유러빈줄 생각혔는데, 동양인이시구마!”
“저를 아세요?”
“고 앞 다찌방 서라베 엽서가 하나 있으야. 일가보면 알게될그요.”
사내의 말에 난 대시보드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잡동사니 틈새에 엽서 하나가 구겨진 채 있었다. 허벅지에 대고 반듯하게 펼쳐보니 익숙한 필체가 나를 반겼다.
친애하는 아르덴 베이커에게.
우리는 실수했습니다. 아주 잘못된 것을 깨우고야 말았습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
엽서는 그렇게 뚝 끊어져 있었다. 또한, 급하게 써내려간 듯 글씨가 심하게 휘갈겨져 있었다.
“어떻게 이걸 가지고 계신 거죠?” 나는 사내에게 물었다.
“나으 조카놈이 야쁘장한 선상님 발굴대에서 일꾼 노르슬 해쓰요. 몽조리 읎어져서 쥬근 줄 아랐는디야, 그노마는 어찌저찌 차잤으요. 엽서는 그노마가 가꼬이써쓰야.”
“그 분이랑 한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소용읎는 일이쟈. 완잔히 미챠버려쓰요. 그라서 지그믄 정신병원에 있는 기요.”
“그렇군요….”
“그노마가 차므로 불쌍한 노미요. 내 그케 가지 말라 했고마, 기어코 용돈을 벌겄다고…. 그고시 마립다, 예부터 불기란 고시라요. 우리 마을 사람덜은 다 알고 이써죠. 거기에는 처녀를 자바 묵는 은빛 비암이 있다혀요. 비암헌티 처녀를 바티야 농사가 잘되는 기라고.”
“지금까지도요?”
“아녀, 아녀유. 스페인 셍교사들이 와가꼬 지쟈쓰 구라이스토의 전지저능한 히므로 비암을 읎앴다고 혀요. 그랴도 꺼림칙한 건 으쩔 수 읎으야.”
“그런가요…. 혹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사원에 가볼 수 있을까요?”
“안댐다. 밤에 그 사원을 가면 크일 남니다. 가더라도 낼 아치매 가능게 조을검다.”
“그럼 잘 곳이 필요한데, 마을에 여관이 있나요?”
“마을이 작아가꼬 그렁거 없으요. 대신 쟈가 작은 술집을 하는듸 거 다락방에 올라가믄 다리 짝 빧고 잘 수가 있는듸, 으떠실랑가?”
“너무 폐 끼치는 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습니다. 제가 뭐 찬밥 더운밥 가릴 만한 처지도 아니고 말이죠. 저기 그럼 제가 얼마 정도를 드려야….”
“아이고 마 개안씀니다. 대신 술 마이 팔아주심 되죠. 으하하하하!”
“술이라…. 그런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신세 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그리곤 다시 시선을 들어 굽이친 길을 바라보았다. 해는 슬슬 서쪽으로 꺾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