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laide Shakespeare
[ There is no escape from the GuestHunter ]
IV.
이른 아침, 나는 사내의 뒤를 따라 숲으로 들어왔다. 길이 험하지 않아 걷기 편했다. 사내는 넓적한 칼을 휘두르며 어린 덤불을 잘랐다. 이런 숲에는 만들어진 길이 없고, 다만 길을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고 사내는 말했다.
언덕 하나를 다 오르자 이내 웅장한 규모의 사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은빛 뱀의 사원은 아스테카 문명이 남겨둔 다른 사원들과는 구조부터가 달랐다. 삼각뿔 모양의 피라미드. 열 개의 단으로 이루어진 그 형태가 온전했다. 계단의 형태나 조각의 주제는 오히려 치첸 이트사의 건축 양식과 유사하다. 그렇지만 이트사 부족의 건축물이라고 하기에는 시대가 맞지 않았다. 아무리 여유롭게 잡아도 13세기 중후반에 건축되었는데, 당시 마야 문명은 이 근방에 오지도 못하였다. 아니면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에 모순이 있던 걸지도. 셰익스피어 교수가 그토록 이 사원에 매달렸던 것도 그러한 까닭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든 세기의 대발견이 될 거라면서 말이다.
사원의 주변으로는 공터가 넓었다. 공터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이렇게 넓혀놓은 것은 탐사대의 짓이라고 사내는 이야기했다. 어쩐지 말투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상당히 공격적이었다.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는 듯했다.
나는 한동안 언덕 위에 서서 공터를 내려다보았다. 고작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는 이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내게 보낼 엽서를 쓰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갑작스레 구역질이 치밀어서, 나는 허리를 숙이고 크게 심호흡했다. 그런다고 속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터의 잡초가 무릎 언저리까지 자라나서, 걸을 때마다 날것의 예리함으로 내 종아리를 건드렸다. 청바지 위로도 그 예리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날이 덥다고 바지를 짧게 입었다면 지금쯤 내 종아리는 아작났을 터다.
“감상이 으띠요, 이케 가까이서 보는 데. 보통 광광지에서 보는 그렁거랑은 비교가 안 되지 않으야?” 사내가 내게 물었다.
“그러게요. 이야기로 들었던 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멕시코시티에서의 세미나는 여러모로 유익했다. 거기 참석한 학자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은빛 뱀 사원에 대해 토론하며 보냈고, 그걸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실물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경외심마저 들 정도였다. 이야기로 들은 것보다 몇 배는 더 압도적이다.
“하여 제가 동하는 기는 예까지라요. 필요한 거슨 그 가방 안에 너어둬쓰니 함 확인해보소.”
“…네, 부탁드린 건 다 들어있네요. 근데 지금 가시는 거예요?”
“그라모 내도 묵고 사라야지 않겄수. 이리 가야 가게 준비도 해이고. 어짜매 이기 한 줄기 뿐인게롱 길 따라 오시마 될기요.”
“알겠습니다. 혹시 제가 해 질 녘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경찰에 연락해주세요.” 나는 지독한 길치인고로, 혹시 몰라 사내에게 다짐을 받아두기로 했다. 다행히 사내는 별말 없이 그러겠노라 대답해주었다.
“그라맨 몸 조시마시고, 이따 보소.” 사내가 떠나고 나는 사원 앞에 홀로 남았다.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주변이 적막했다. 헛기침을 해보았지만, 기침 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적막에는 그러한 무게감이 있었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피라미드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계단을 따라 거기까지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일이었다. 원체 무릎이 좋지 않아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느긋하게 계단을 올랐다.
사원 안쪽으로 빛이 들지 않아 내부는 어두침침했다. 나는 가방에서 랜턴을 꺼내 불을 밝혔다. 후텁지근한 바깥과 달리 내부는 무척이나 시원했다. 그러나 숨쉬기 힘들 정도로 공기가 눅눅하고, 바닥에 자라난 이끼가 미끄러워 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랜턴의 밝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건전지 문제인 거 같은데, 어느새 불빛은 바닥을 살피기도 어려울 정도로 침침해졌다. 나는 한 손으로 사원의 벽을 짚으며 천천히 걸어야 했다.
지하로 통하는 길은 폴리스 테이프로 완전히 봉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출신이 테이프인지라 뜯어내기가 어렵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붙여놓을 수 있도록 살살 떼어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습하지 않아 상쾌했다. 나는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눅눅한 공기를 털어내었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은 한참을 이어졌다.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으로 사원 지하는 충분히 밝았다. 나는 랜턴을 가방에 집어넣고 계단의 중턱 정도에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구형으로 닫혀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원 지하는 꼭 거대한 석회동굴 같았다. 축구 경기장 두 개 정도는 여유롭게 들어갈 만한 공간에 높이도 상당하다. 바닥은 사람의 손을 거친 듯 대체로 평평했고, 천장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몇 세기 전에 만들어진 공간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하가 기둥 하나 없이 이렇게 텅 비어있으면 사원은 주저앉아야 마땅하다. 수수깡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하나가 집채만 한 돌덩이다. 하지만 은빛 뱀의 사원은 현대 건축역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 굳건히 버티고 서 있었다.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조였다. 만약 내가 물리학자였다면 어떻게 대략적인 값이라도 추정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엔리코 페르미가 핵폭탄의 위력을 어림짐작했던 것처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받은 학위는 분자생리학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하의 구조는 이상했지만, 버젓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을 불가능하다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상식이 부족했구나, 정도로 타협하고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흠, 생각했던 거랑은 완전 딴판인데.”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것을 ‘기대’라고 불러도 좋은지는 둘째 치더라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없을 줄은 몰랐다. 뭔가 거창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한 까닭에는 별다른 논리가 없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가 죽었다. 존경받아 마땅한 최고의 고고학자가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 위대한 명장에 걸맞은 명예로운 죽음은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전사하는 것이다. 뛰어난 고고학자의 죽음도 그러해야 했다. 그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이곳은 평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원 아래의 풍경은 내 기대를 크게 벗어났다. 어찌나 별 볼 일 없었던지,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다만 바닥에 흩뿌려진 핏자국만이 그날의 참상을 증거하고 있었다. 한동안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핏자국 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여기 계속 있어 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다. 나는 마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한데 그 직후, 나는 정말 믿기 힘든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내 필력은 삼류에조차 미치지 못한다. 모자란다는 말로도 모자란 필력이다. 하여 그날의 경험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그러나 그냥 넘어가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최대한 세밀하게 서술하고자 노력하겠다.
사방에서 경쾌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동굴의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윗덩이를 쌓아 만든 경기장이었다. 건장한 남자 열댓 명이 강철 보호구를 입고서 공을 찼고, 주변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선수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축구와 럭비를 적절하게 섞어놓은 듯한 스포츠였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경기장이 와르르 무너지고, 어둑한 하늘에서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은 빗줄기를 잊은 채 망국의 백성처럼 울부짖었다. 흰 피부의 군대는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댔다. 죽음과 죽임이 넘쳐 평원은 핏빛이었다. 절규와 함성이 한 데 뒤섞여 불분명했다.
그 섬뜩한 소음에 압도당한 내가 주저앉아버리자, 마침내 풍경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거운 적막도 어슴푸레한 빛도 선선한 공기마저도 그대로다. 다만 모든 것이 본래의 풍경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은빛 뱀과 마주했다. 집채만 한 크기가 뿜어대는 위압감은 상당했다.
“하, 이렇게까지 현실감 넘치는 환영이라면 속을 법하네….”
또 다른 환영이라는 걸 나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오늘날의 육상 동물은 이 정도로 거대하게 성장할 수 없다. 백악기라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석사 과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속으로 기뻐하면서도, 나는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위압적이라고 해도 환영은 환영일 뿐이다. 그러니 이 근처 어딘가에 함정 장치가, 셰익스피어 교수를 두 동강 내버린 바로 그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 터였다. 섣불리 도망치려 했다가는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 나는 숨까지 참으며 환영이 끝나길 기다렸다.
가공의 위협은 혀를 날름거리다 말고 갑자기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러더니 나를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것이 환영이라는 걸 알면서도 공포감에 휩싸인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눈이 절로 번쩍 뜨였다. 웬 여자 하나가 왼발로 뱀의 아래턱을 밟고, 오른손에 쥔 시미터를 왼손으로 받쳐 든 채 뱀의 두 송곳니를 막고 서 있었다. 그것은 환영임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이상한 광경이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뒤늦게라도 대답하고자 했으나, 환영은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맥락 없이 끝나버렸다. 마치 영화 필름이 도중에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도대체 뭐였을까.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몸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다리 한 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래도 왼쪽 무릎이 기어코 고장나버린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