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가 악해질 수 있는 것은
I.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 한 악마가 살았어요. 악마는 직업이 없어서 하루종일 자취방 바닥을 뒹구는 백수에 한량이었답니다. 그래도 꼴에 악마라고 장난치는 건 참 좋아했어요. 바닥을 뒹굴면서도 취업할 생각은 없고 맨날 장난칠 궁리만 했어요.
어느날 악마는 장을 보러 대형 마트를 찾았어요. 마트 주차장에는 악마가 주차할 자리 하나 없이 자동차가 꽉꽉 들어차 있었어요. 몇 번을 오르락 내리락 한 끝에 겨우 악마는 주차를 할 수 있었지요. 악마는 주차하느라 시간을 이렇게 허비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어요. 그리고 곧 재미있는 장난이 떠올랐지요. 마침 대형 마트에는 장난에 필요한 도구가 잔뜩 있었거든요.
마트가 문을 닫은 새벽에 악마는 몰래 마트 주차장에 들어갔어요. 그리고는 낮에 마트에서 구입한 붓과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똑같은 그림을 몇 번이고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아침에 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악마는 폴짝폴짝 신이 났어요. 세 시간 동안 수백개의 그림을 그리고 나서야 악마는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다음날 마트를 찾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모든 주차 공간에 장애인 주차공간 그림이 그려져 있었거든요. 운전자들은 3층부터 7층까지 계속 오르락 내리락 했지만 어디에도 주차할 수 없었어요. 그 모습을 본 악마는 깔깔거리며 웃었답니다. 화가 난 사람들은 악마를 향해 “저 사악한 악마!”라고 소리쳤으나 악마에게는 칭찬일 뿐이었어요. 악마는 더욱 신이나서 웃었습니다. 마트의 직원들이 페인트로 그림을 지우기 전까지, 사람들은 주차하지 않았어요.
장난이 성공하자 악마는 더 큰 꿈에 부풀었어요. 마침 페인트도 많이 남아있었죠. 악마는 페인트를 환불하는 대신 다른 마을 대형 마트에 장난을 치기로 했답니다. 이번에도 새벽에 몰래 들어가서 그림을 그렸어요. 주차 공간이 더 넓어 그려야 할 그림도 더 많아졌지만, 이미 한 번 성공의 맛을 본 악마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그림을 그렸지요.
이번에 악마는 아예 아침부터 숨어서 주차장을 지켜보았어요. 많이 피곤했지만 사람들이 당황하고 화를 낼 거를 생각하니 힘이 솟았지요. 드디어 10시가 되었어요!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주차장으로 들어왔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장애인 주차 구역 그림이 그려진 곳에 주차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악마는 당황해서 운전자 하나를 붙잡고 물었어요.
“아저씨, 여기 장애인 주차 구역인 거 안 보여요?”
“뭐 이 새끼야. 어쩌라고. 여기 다 휠체어 그림 그려져 있는데 그럼 주차하지 말까? 어? 딴데 가서 장 봐? 너 장사하기 싫어?” 운전자는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 했어요.
악마는 풀이 죽어서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덧붙이는 말
이 작품은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브릿G 덕분에 쓰게 된 단편입니다. 브릿G에서는 작가들이 모여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단편을 쓰는 백일장이 종종 열리는데, 이 작품은 "어린이날 기념 단편 백일장(줄여서 #네버랜드)"에 출품하기 위해 적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의 악마처럼 백수(정확히는 휴학생인데 뭐 백수나 다름 없으니)입니다. 그래서 방바닥을 뒹굴며 인터넷 서핑을 할 일이 잦죠. 어느날은 외국계 움짤 사이트를 구경하는데 재미있는 움짤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움짤이 이 작품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움짤의 링크는 여기 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순수하고 귀여운 글을 쓸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린이들이 끓는 물에 머리를 처박고 집단 자살하는 내용을 쓰고 싶었지요. #네버랜드에 출품하기에는 너무 고어하단 비판이 들어와서 급히 이쪽으로 선회한 것입니다. 아마 그것도 쓰긴 할 겁니다. 언제 쓸 지는 모르겠지만요ㅎㅅ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