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재앙의 불길이 떨어지던 밤을 기억한다.
용사는 몸을 낮춘 채 회랑 너머를 살폈다.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노을이 뽀얗게 쌓인 먼지 위를 덮는다. 고블린 근위대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그들의 순찰 경로에서 벗어난 듯했다. 용사는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걸음과 걸음 사이에 먼지가 뒤따랐다.
왕국의 옛 수도는 르가논 산맥의 기슭에 포개어지듯 자리 잡았다. 뒤로는 대륙에서 가장 험난한 산으로 보호받고, 앞으로는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어 왕조는 번영했다. 이 시기에 수도 근처의 구리광산에서는 은안개* 광맥이 발견되었다. 왕가는 광부 조합원들에게 입단속을 당부했으나,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은안개가 가진 막대한 가치는 주변 국가들을 눈 멀게 하기 충분했다. 수많은 나라가 장장 십여 년에 걸쳐 침공해왔으나 왕국은 어렵지 않게 백성과 영토를 지켜내었다. 오랜 전쟁은 장군과 병사를 최상의 상태로 단련시켰다. 왕국의 대대 하나가 적국의 여단 두셋을 능히 막아낼 정도였다.
하지만 재앙의 불길 앞에서는 모두가 무력했다. 용사는 재앙의 불길이 떨어지던 밤을 기억한다.
세상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에 눈이 절로 떠졌다. 오밤중인데도 바깥은 훤했다. 용사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집채만 한 불덩이 몇 개가 길게 꼬리를 끌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불덩이가 어디에 떨어질지는 그야말로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용사는 옷가지 몇 개만 챙긴 채 잠옷바람으로 집을 뛰쳐나왔다.
불덩이는 곧장 수도 한가운데로 쏟아져 내렸다. 세기를 버텨온 가옥이 무너지고, 사이사이로 아직 숨이 끊이지 않은 자들의 비명이 흩날렸다. 손바닥 뒤집듯 그렇게 간단히 세상은 지옥으로 변했다.
아비규환의 한복판으로 재앙의 원흉이 내려앉았다. 제가 떨어트린 불덩이만큼이나 새빨간 용이었다. 아가리를 벌리자 목구멍 너머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녀석은 고개를 홰홰 휘저으며 사방으로 불을 뿜었다. 비명소리가 달아올랐다. 산채로 불타고 있을 시민들을 생각하니 두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과 함께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산목숨은 살아야 한다. 용사는 서둘러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은 피난 준비로 한창이었다. 사령관은 수도 내외의 모든 병력을 투입하여 시민을 구하고, 가능하면 용을 수도 밖으로 쫓아내고자 했다. 녀석을 죽인다는 생각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왕은 은안개로 덧댄 마차를 타고 먼저 피신하였다. 사령관은 왕자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사령관, 제게도 명령을!”
“자네는 은안개를 수송하는 부대를 지휘하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살아서 보길 바라겠습니다.”
“자네도 조심하게.” 사령관이 말했다. 은안개 한 수레면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만큼 강력한 군대를 1년 동안 먹이고 무장시킬 수 있다. 잡히는 대로 한 줌 잡아 주머니에 넣는 것만으로도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그러니 수송 과정에서 병사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고, 적국에서 수송 부대를 급습할지도 모른다. 책임이 막중했다.
왕가의 창고에서 은안개를 옮겨 싣고 있는데, 갑자기 성안으로 불길이 밀려들었다. 시민을 구하는 데 온 병력이 집중된 탓에 성은 무방비였다. 용은 두 다리로 먹이를 낚아채듯 왕자를 붙들고 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장 무기를 챙겨 용의 뒤를 쫓아 왕자를 구하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용사에게는 막중한 임무가 맡겨져 있었다. 왕자를 구하는 것은 사령관이 알아서 할 것이다. 용사는 그렇게 생각하고 눈 앞의 임무에 몰두했다.
창고의 은안개를 모두 꺼내자 다섯 수레 분량이었다. 같은 부피의 금이었다면 마구간에 매여있는 말 전부를 데려다 수레를 끌게 해도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은안개는 은처럼 반짝이고 안개처럼 가볍다. 다섯 수레를 끄는 데 다섯 마리면 충분했다. 용사는 믿음직한 병사를 추려 수도에서 30마일 떨어진 리펜잔으로 달렸다. 왕은 거기서 몸을 돌보고 있었다.
용사는 수도에서 있었던 일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제 자식을 구하는 대신 백성을 구하는 데 힘을 쏟으라 하였다. 용사는 가져온 은안개 다섯 수레를 왕가의 재무대신에게 인계하였다. 수도로 돌아가자 사령관은 죽어있었다. 애석한 일이었으나 애도할 시간은 없었다. 용사는 병력을 수습하여 시민을 구하는 일에 주력했다. 용은 왕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지 않았고, 소방대가 간신히 불길을 잡았다.
구조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 여럿이 힘을 모아 바위를 들어 올리면 병사들이 재빨리 들어가 시민을 구하는 식이었다. 대단히 비효율적인 작업 방식이었으나, 다행히 이곳은 수도였다. 국경 다음으로 병력이 차고 넘치는 게 수도사령부이고, 길을 걸으면 돌멩이 다음으로 많이 발에 걸리는 게 마법사다. 용사는 비효율적인 작업방식을 압도적인 인력으로 때웠다. 동틀 녘에 구조는 마무리되었다. 재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자 왕궁 쪽에서부터 수천 명의 고블린 무리가 쏟아져나왔다. 밤샌 구조 작업으로 녹초가 된 병력은 맥을 쓰지 못했다. 용사는 후퇴를 명령했고 고블린 부대는 성 밖으로 쫓아오지 않았다. 병력은 꼬박 한나절을 걸어 리펜잔에 당도했고, 이틀 휴식을 취한 뒤 왕의 은안개 마차와 함께 다시 나흘을 걸어 빈찬토쟁에 도착했다. 왕은 수도를 탈환할 때까지 빈찬토쟁을 임시 수도로 지정하겠다 공포했다. 용이 다른 보금자리를 알아보지 않는 이상 수도는 탈환을 꿈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곧 수도 앞에 ‘옛’을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왕명을 받고 흩어진 조사단은 한 달 만에 100여 장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수천 장이 넘는 부록 1과 부록 2는 덤이었다. 같은 재앙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국방대신을 비롯한 수많은 장군과 신하들이 보고서와 부록을 닳도록 읽었다. 세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1) 붉은 용의 목적은 처음부터 왕자님이었다.
2) 고블린 부대는 구리광산의 42번 갱도를 연장하여 왕궁까지 이어지는 땅굴을 팠다.
3) 아직도 수도 탈환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꿈 깨는 것이 좋다.
조사단은 일주일 뒤 추가로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내용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보고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공개되었지만, 거기서 희망을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란스러운 두 달을 큰 위기 없이 헤쳐온 데에는 재무대신의 공이 컸다. 재무대신은 자신이 왜 고액 연봉을 받는지를 수많은 신하 앞에서 증명해내었다. 구리광산이 고블린 부대에 의해 폐쇄된 이후 안 그래도 비싸던 은안개의 가격은 이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자네가 가져온 다섯 수레 분량의 은안개만 있으면 세상을 구매할 수도 있을 걸세.” 재무대신이 말했다.
“그럼 우선 세상의 주인이 누군지부터 알아봐야겠군요.” 용사는 별 의미없이 맞장구를 쳤다.
재무대신은 자금 융통이 어려워질 때만 은안개를 시장에 풀었고, 그것도 극소량만을 유통시켰다. 특정 국가가 은안개를 매점하지 못하도록 유통 경로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도 재무대신의 일이었다. 티끌모아 태산이 될 수도 있으니까. 왕국에 적대적인 나라에서 은안개를 비축한다면, 당장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적의 손에 칼자루를 쥐어주는 꼴이 되어버린다.
은안개를 판매하여 생긴 돈으로 국경의 병력을 증강하였고, 3분기 예산을 집행하였으며, 그러고 남은 돈 얼마로 이재민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고 피해보상금을 지급하였다.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보상금을 지불하였음에도 여전히 돈이 남았다.
“정확히 얼마가 남았는지 이야기해보게.” 왕이 말했다.
“2백억 칼릿 정도입니다. 물론 은안개가 네 수레 정도 남았고, 당장 현금화 할 수 있는 자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올해 예산 등 왕가의 많은 자산이 아직 수도에 묶여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재무대신이 답했다.
“왕자를 구해오는 자에게 은안개 한 덩이와 얼마 정도의 현금을 주고자 한다. 어느정도로 책정해야 국정에 무리가 없겠는가.”
“전하, 왕자님을 구해오는 것은 군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은안개를 낭비하지 마시고 군에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당장 출병하여 왕자님을 구해오겠습니다.” 재무대신이 입술을 떼기도 전에 빈찬토쟁 주둔 사령관이 말했다. 그러나 왕은 고개를 저었다.
“왕자 한 사람 구하기 위해 그 많은 병사를 동원한다면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왕은 단호했다. 재무장관은 내일까지 계획서를 만들어 올리겠다고 답했다. 최종적으로는 ‘가보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멋들어지게 만든 은안개 장검과 5천만 칼릿, 그리고 일곱 대에 걸쳐 귀족 작위를 보장해주는 것으로 갈무리되었다.
돈과 명예와 은안개를 좇아 용감한 젊은이들이 옛 수도로 향했다. 그러나 돌아온 자는 손에 꼽았다. 붉은 용의 고블린 근위대는 상상 이상으로 잘 훈련된 조직이었고, 근위대를 우회하여 붉은 용을 상대한 자는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했다. 재무대신은 포상을 두 배로 늘렸지만 목숨값으론 부족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옛 수도에는 먼지만 날렸다. 대부분의 기억 속에서 왕자의 존재가 잊혀갈 때쯤, 용사는 남몰래 준비를 마치고 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