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용사는 재빨리 주변을 살핀 후 확신했다. 그 어떤 책에서도 용이 마법을 쓴다는 이야기는 읽지 못했지만, 붉은 용이 마법을 쓰는 건 확실하다. 조금 전까지 헤매던 곳과는 완전 딴판이었으니까. 이동 마법으로 잡혀온 게 아닐까 용사는 추측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명제 하나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블린 근위대를 우회하여 붉은 용을 상대한 자는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했다. 때문에 용사는 ‘근위대를 우회하지만 붉은 용은 상대하지 않는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근위대를 우회하자마자 마법으로 납치를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왕자를 구하기 위해 용사는 다양한 계획을 준비하였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외였다. 용사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걸 느꼈다. 타인의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을 꺼리지 않았지만, 자신이 하나의 실패 사례가 되는 건 썩 달갑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늘. 여의 도시를 찾은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냐.” 붉은 용이 말했다.
“우선 정정하자면 이곳은 당신의 성이 아니오. 당신은 이곳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소. 왕국의 옛 수도를 무력으로 불법 점거하고 있을 뿐이지. 그리고 왕자를 되찾고자 옛 수도를 찾았던 젊은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네놈도 같은 꼴이 되고 싶은가.”
“자살하고 싶었다면 더 빠르고 안락한 방법을 택했을 거요. 용의 아가리로 뛰어드는 게 아니라.”
“모순적인 이야기로다. 너는 왕자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더냐? 여를 상대하지 않고 왕자를 구할 길은 없다. 그게 아니면 너는 여를 죽이고 왕자를 구할 수 있다고 그토록 확신하는 게냐.” 용은 웃었다. 그 웃음의 끝자락에서 영원을 사는 자의 여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용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용이 웃음을 그쳤다. “농담이다. 오래간만에 여의 도시를 찾은 인간이 누군지 궁금하여 농담 좀 해보았을 뿐이다. 창고는 저쪽이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도 좋다.” 용은 고갯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 용사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바닥에 뿌리내린 듯 꼼짝 않고 용을 처다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연속이었다.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 굴리는 데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뭐 하느냐. 어서 가보지 않고.” 붉은 용이 자꾸만 채근했다.
“……무슨?” 겨우 한 단어가 목구멍을 넘어왔다. 갑자기 온 몸의 수분이 말라버린 듯 목구멍이 뻣뻣해져서, 그 이상의 단어는 넘어오지 못했다. 이러한 용사의 반응이 의아했는지 붉은 용이 물었다.
젊은이들은 세 개 조로 나뉘어 움직였다. 두 개 조가 고블린 근위대를 교란하는 동안 나머지는 왕궁 안으로 흩어져 왕자를 찾아낸다. 은안개와 현금은 미리 정해둔 비율로 나눠 갖기로 했고, 붉은 용에게 죽임을 당하는 인원이 생기면 그 몫은 반드시 부모에게 전하기로 약속했다. 만약 왕궁 안으로 들어간 인원이 해가 뜨고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바깥에 있던 사람들은 미련 없이 도망칠 것이다. 그게 젊은이들의 계획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다들 꽁지 빠져라 도망가고도 남았을 테다. 아무도 우리를 구해주지 않겠지. 뾰족귀는 팔짱을 낀 채로 동료들을 살폈다. 그곳에 갇힌 건 뾰족귀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었으나,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도망치려 했고 다음에는 신에게 기도했으나 결국에는 모두 포기했다. 뾰족귀를 제외한 모두가 모든 것을 포기했다.
물리적으로 갇혀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로 도망가든 결과는 같았다. 뾰족귀는 붉은 용이 마법을 쓰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왕궁 전체를 휘감고있는 이상한 마력 파동을 보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뾰족귀는 마음이 꺾여버린 동료들을 버려두고 왕성 곳곳을 돌아다녔다. 어디로 가든 결과는 같았지만, 덕분에 알게 된 것도 많았다.
마법은 붉은 용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발동된다. 미리 설정된 구역을 침범하면 곧바로 붉은 용의 앞으로 소환되고, 도망치려고 할 때마다 같은 마법이 발동되는 식이었다. 상당히 복잡하게 짜여있어서, 동네 문화회관에서 소일거리로 마법을 배운 뾰족귀로서는 그 구조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결국 붉은 용이 놓아주기 전까지는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겨우 얻은 결론치고는 희망적이지도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용이 눈을 떴다.
자고 일어나니 인간 몇 명이 눈 앞에 앉아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붉은 용은 조금도 의아하지 않았다. 왕자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마법이 오히려 침입자 잡는 데 쓰이고 있다니. 붉은 용은 고블린 근위대의 월급 삭감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근위대 노조가 아무리 반발해도 이번에는 정말로 월급을 깎고 말리라. 최고 수준의 월급을 지불하면 돌아오는 서비스도 최고 수준이어야지!
“저기, 용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귀 뾰족한 인간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해보거라.”
“우선 처소에 몰래 들어온 거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용님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짓을 하려고 들어온 것은 아녜요. 저희는 필요한 것만 몇 개 챙겨서 나가려고 했어요.” 붉은 용은 몰래 들어왔다고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뾰족귀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다. 흥미가 생겨서, 불을 뿜어 태워버리는 대신 느긋하게 이야기나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너희들이 필요한 건 왕자 아니더냐. 왕자를 구하면 부와 명예를 손에 쥘 수 있을 테니.” 붉은 용이 묻자 뾰족귀는 빠르게 부정했다.
“저희는 왕자를 구하러 온 게 아녜요. 생각해보세요. 용님과 싸워 왕자를 구하고 돈과 명예를 얻을 바에야, 그냥 돈만 얻는 쪽이 쉽고 간단하잖아요. 명예 같은 건 쓸모도 없고.” 뾰족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붉은 용은 대번에 이해했다. 그럴 수 있다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인간 주제에 담대하기가 이를 데 없다.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원하는 만큼 챙겨도 좋으니 다시는 이곳을 찾지 말아라. 또한, 네가 왕자를 구하기 위해 붉은 용을 상대하였으나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소문을 내어라.” 소문이 퍼지면 아무도 옛 수도를 찾지 않을 테고, 그것이 붉은 용의 노림수였다. 귀찮은 일을 더는 것. 인간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침입자를 일일이 불태워 죽이는 것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젊은이들은 왕자의 구출에 걸려있는 일확천금에 눈이 멀었던 거지, 왕자의 구출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재앙의 불길이 떨어지던 밤에 용사는 가장 값나가는 것들을 챙겨 뺘져나왔지만, 창고에는 여전히 왕가 소유의 보물로 가득하다.
“하여 지금껏 여의 도시를 찾은 젊은이들에게 소문을 퍼트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창고를 열어주었지. 하지만 반응으로 짐작하건대, 너는 그런 소문을 들어본 적 없는 듯 하구나.” 붉은 용의 말 그대로였다. 근위대를 우회하여 붉은 용을 상대한 자는 누구 하나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오지 못했기에 용사는 그들이 살해당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왕가의 보물을 탐하다니! 용사는 배신감마저 느꼈다. 왕자를 구해 돌아갈 수 있다면, 반드시 그들을 찾아내여 댓가를 치르게 하리라.
“너는 어찌할 테냐. 보물을 챙기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물론이오. 나는 왕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왔으니. 하지만 지금 당장은 당신을 적대하지 않겠소.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용사가 배운 것이 있다면 붉은 용은 협상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용은 생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연재해에 더 가까운 존재이지만, 협상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자연재해와 차이가 있다. “대신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하는데.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요.”
“해보거라.”
“그 전에 먼저 내 질문에 답해주면 좋겠는데. 당신네는 영원을 사는 존재요. 그동안 고귀하고 아름다운 걸 수도 없이 봐왔을 텐데, 어째서 한낱 인간 따위에 그리 집착하는 거지?”
“틀리다. 왕자는 여가 지금껏 살면서 보았던 인간 중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이다. 세상 그 어떤 보석을 가져와도 왕자 앞에서는 빛을 잃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손에 넣어야 했다.”
“하지만 인간은 보석과 달라서 언제까지고 손에 쥐고 있을 수 없소. 당신이 시체까지도 사랑한다면 모르겠지만, 그 시체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겠고.”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아는지 모르겠지만, 혼자 고독히 있다 보면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거든. 그리고 스트레스는 명줄을 깎아 먹지. 왕자가 장수의 혈통을 타고났더래도 이런 환경에서는 몇 년을 넘기지 못할 거요.”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 용은 재차 물었다.
“왕자를 풀어주시오. 그게 당신을 위하는 길이니까.” 용사가 말했다.
“여가 어째서 그래야 하지?”
“왕자가 당신의 것이니까.“
“두 말은 모순되도다.” 용이 말했다.
“전혀.” 용사가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받아쳤다. “사람들이 잠금장치 여럿 달린 보석함에 귀중품을 넣어두는 까닭은 누군가 훔쳐갈 것을 염려하여 그러는 것이오. 하지만 왕자는 도둑맞을 수 없소. 당신이 왕자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인간이라면 왕자를 차지하기 위해 당신과 대적할 리 없고, 대륙에 용이라면 당신이 유일하잖소.”
“왕자를 자유롭게 하여도 여전히 왕자는 여의 소유란 뜻이냐.”
“그렇지. 어차피 당신 말고는 왕자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왕자가 여기 갇혀 우울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편이 당신에게도 이득일 것 아니오.”
“하지만 왕자가 자유로워진다면 그것이 여의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유목민이 목초지에 양을 풀어놓는다고 해서 양이 유목민의 소유가 아닌 건 아니잖소.” 왕자를 가축에 비유하다니 이건 빼도 박도 못 할 반역죄이다. 하지만 듣는 귀가 용 하나뿐이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틀리다. 유목민이 목초지에 양을 풀어놓는 것은 양이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허나 왕자는 제 백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여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백성의 품은 너무나도 형이상학적인 개념이오. 왕자가 일일이 백성의 집을 방문해서 품에 안기는 일은 없을 테니. 게다가 어린 양이 제 어미의 품을 파고들어도 여전히 그 양은 유목민의 것이잖소.”
“너의 말이 틀리지 않다. 그러나 왕자가 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옳은 말도 틀린 것이다.”
“그 문제 말인데,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소. 당신이 ‘왕자가 돌아가야 할 곳’에 머무른다면 모든 게 해결되지.” 용사가 말했다. 의미심장한 웃음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