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왕자는 본인의 방에서 머무르고 있다. 그 위치를 아느냐.” 붉은 용이 말했다. 용사는 고개를 저었다. 암살의 위험 때문에 왕족의 침실은 계급 높은 몇 시종들 빼고는 알지 못했다. 그런 용사를 위해 붉은 용은 마법으로 작은 불빛을 만들어내었다.
“이 반딧불이를 쫓아가면 왕자의 방이 나올 것이다. 다시 돌아와도 나는 찾을 수 없을 테니 놓치지 말고 잘 쫓아가도록 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빛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사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불빛을 쫓았다. 불빛은 한참을 움직이다 어느 나무문 앞에서 사라졌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작은 등불이 켜져 있다. 덕분에 사물을 분간할 만큼은 되었다. 용사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로 누군가 누워 있었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익숙한 뒷모습이다. 용사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 희미한 인기척에 왕자는 잠에서 깬 듯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등불에 비친 용사의 얼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었다.
두 사람은 있는 힘껏 부둥켜안았다. 몇 년만에 안아본 왕자의 몸은 상당히 야위어있었다. 맞닿은 피부로 갈빗대가 느껴질 정도였다. “나를 구하러 온다면 그건 너 일거라고 생각했어.” 왕자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조금 섞여있었다.
용사는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까지 속일 수는 없었으니까.
용을 죽이고 왕자를 구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용을 속이고 왕자를 구하려고 했다. 마법을 쓴다고 미리 알았더라면 그것까지 고려하여 계획을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 수 없었기에 대비하지 못했다. 용사는 용과 타협하여 왕자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용을 속이려 했다니?” 왕자의 말에 용사는 작은 가방에서 물건 몇 개를 꺼냈다. 다이너마이트 몇 다발과 손가락만 한 인형이었다.
“뒤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인형이 팽창하거든. 이 인형을 여기 두고 다이너마이트로 방을 무너트리려고 했어. 인형은 으스러질 테니 용은 네가 죽은 거로 알 테고, 목적을 잃은 용이 이곳을 떠나리라 생각했거든.” 이 경우 왕자가 살아있다는 이야기가 새어나가면 곤란해진다. 속았다는 걸 깨달은 붉은 용이 다시 찾아올 테니까. 용사는 재앙의 속편을 찍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 계획이 성공했다면 왕자는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다. 생각만큼 신나는 일은 아니겠지만, 붉은 용의 손아귀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몇 배 더 행복한 삶일 거라고 용사는 생각했다.
용을 속여넘기겠다는 계획은 시도조차 못 하고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계획이 실패하여 오히려 더 잘 되었다. 붉은 용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왕자는 안전하고 재앙은 다시 없으리라.
왕자가 성을 벗어나고 싶어 하여, 용사는 해가 뜨지 않았음에도 이동하기로 했다. 몇 년 동안 몸이 많이 약해졌으나 제 다리로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옛 수도에 고블린 근위대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붉은 용이 마법으로 치운 걸까. 용사의 딴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 밖의 나무에 묶어두었던 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분명 단단하게 동여매었는데…. 결국 가까운 마을까지는 걸어 갈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민가 몇 채가 있었으나 누가 살고 있지는 않았다.
아침 해가 뜨고도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두 사람은 리펜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펜잔 성주는 왕자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용사는 필요한 것을 요구했고, 성주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준비해주었다. 왕자는 리펜잔에서 나흘간 머물며 몸을 돌보았다.
왕자와 함께 팔두마차를 타고 빈찬토쟁에 토착했을 때, 도시는 이미 축제 분위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무엇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인지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용사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왕자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왕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용사가 거리를 거닐 때면, 몇 명이 몰려와 “제 부모님의 복수를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은 “제 자식의 복수를 해주시다니, 이 감사함을 어떻게…” 따위의 말을 전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용사의 몫까지 계산하고 나갔다.
그래서 용사는 더더욱 집 안에 틀어박히게 되었다. 집에 스스로를 유폐(幽閉)한 이후로 그 꿈을 꾸는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꿈속에서 용사는 불타는 수도 한복판에 서 있었다. 붉은 용이 아가리를 벌리자 목구멍 너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무너진 가옥 사이사이에서 비명이 새어 나온다. 용사가 듣지 않으려 애를 쓸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싸우지 않고 왕자를 구할 수 있었다면”
“왜 우리가 죽을 때는 구해주지 않은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고”
“왕자는 왕자니까 목숨 걸고 구하러 간 거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용사라고 불리는 거지”
“너는 우리를 구할 수도 있었다고”
용사는 깊게 잠들지 못했고, 다시 잠들어도 비슷한 꿈을 꿨다. 그들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것이 용사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들의 말이 틀린 게 아닐지도 몰랐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용사는 홀로 국립묘지를 찾았다.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용사는 뾰족귀를 용서하기로 했다. 만약 뾰족귀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용사가 아니라 왕 혹은 왕자일 것이다. 그러나 뾰족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고하지 않음으로써 용사는 왕가를 대신해 자신이 뾰족귀를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뾰족귀 그자가 누구든 간에 처음부터 왕가의 보물을 탐했던 것은 아닐 테니까. 그저 제 한 목숨을 보전하고자 머리를 짜낸 결과가 그거였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용사 자신도 왕가에 대한 불경죄를 저질렀으니 뭐라 할 처지도 못 된다.
“당신들이 나를 용서해줬으면 해요. 나도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을 테니까.” 야심한 국립묘지에는 혼잣말을 들어줄 이가 없지만, 그럼에도 용사는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며 자꾸만 용서를 구했다.
왕자가 리펜잔에 도착하자마자 리펜잔 성주는 수도로 연락을 보냈다. 왕은 가능한 서둘러 조사단을 꾸려 옛 수도에 급파했다. 조사단은 나흘만에 조사를 끝내고 돌아왔다. 보고서는 간결하여 읽기에 좋았다.
1) 붉은 용의 유해는 찾지 못했음. 아쉽
2) 고블린 무리는 수도를 떠난 듯함. 그러나 어떤 경로로 어떻게 떠났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3) 하여튼 수도는 안전하다.
보고서가 올라오자마자 왕은 병력을 파견하여 마법사들과 함께 수도를 정리하게 하였다. 수습하지 못한 유해를 마저 거두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이미 몇 년이 지나 백골로 남았지만, 그거라도 수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유족들이 말했다. 용사는 병사들과 함께 수도에서 유해를 수습했다. 그것으로 속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용사는 병사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평선에 먼지구름이 이는 것을 보았지만, 별일 아닐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기수(騎手)는 푸른 깃발을 등에 이고 있었다. 왕명이었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빈찬토쟁으로 가시죠.”
“무슨 일로?”
“그것은 알지 못합니다. 저는 그저 전하께서 찾으신다는 이야기만 전할 뿐입니다.” 용사는 부관에게 현장을 맡기고 기수를 따라 나섰다. 말을 바꿔가며 하루 밤낮을 달려야 했다. 쉴 틈은 없었다. 빈찬토쟁 임시 왕궁 앞에서 시종 하나가 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반의 반나절만 집에 다녀오겠다 했으나 시종은 단호했다. 조금만 더 단호했으면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근위대가 문을 열어주었다. 넓은 방 안에 가득히 모여 섰던 문무백관의 눈동자가 용사에게 향했다. 무슨 상황인지 바로 감이 왔다. 누가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용사는 왕의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바닥에 닿지마자 왕의 왼쪽에 서 있던 내각대신이 왕을 대신하여 열 몇 페이지가 넘는 참잘했어요 문서를 읽었다. 칭찬하고 칭찬한 다음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용사는 문서의 일관성에 속으로 감탄했다. 내각대신의 말이 끝나고 왕이 칼을 뽑아들었다.
“전하, 제게 작위를 내리시기 전에 감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용사가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냐.” 왕은 칼을 거두며 말했다.
“저는 은안개도 귀족 작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말해보아라. 내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못 들어주겠느냐.”
지금 아니면 적당한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용사는 힘겹게 입을 뗐다.
“왕자님을 제게 주십시오. 평생 행복하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흐음….” 용사의 말을 들은 왕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침묵이 길어졌다. 용사도 말을 아꼈다.
“그 부탁은 내가 허락하기가 어렵구나. 나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을 들어주겠노라 하였다. 그러나 왕자는 짐의 것이 아니라 왕자 자신의 것이다. 너 용사의 부탁은 향해야 할 사람을 틀렸다.” 왕은 부드럽게 웃었다. 용사는 몸을 살짝 돌려 왕자 오른쪽에 서 있던 왕자를 향해 섰다. 왕자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있었다. 용사는 다시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내가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그러니 나랑 결… 나랑 결혼해줄래.”
왕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왕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용사를 일으켜 입을 맞추었다. 씻지도 못해서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용사도 기쁜 마음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용사가 고개를 돌리자, 까마귀 남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있었다.
“전하, 소신이 한마디 올리겠습니다. 저는 두 분이 맺어지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분을 따지고자 하는 것이냐. 용사는 나를 구하였고, 때문에 왕명으로 7대까지 귀족 작위를 보장받는다. 반역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용사는 나와 결혼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니면 공이 반역을 저지르고자 하는 건가?” 왕자가 말했다. 까마귀 남작은 더욱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저하, 저는 용사의 계급과 신분을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저는 두 분의 성별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두 분 다 남성이시지 않습니까. 남성끼리 결혼이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