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까마귀 남작의 말에 용사와 왕자 두 사람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이라 더욱 충격적이었다.
“경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똑바로 알고 말하는가.” 왕자가 말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까마귀 남작은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채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경은 뭐가 문제인 거지?”
“왕가에서 동성 결혼은 전례가 없사옵니다, 저하.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사옵니까!”
“내가 최초라는 것 외에 뜻하는 바가 없도다.” 왕자는 단호했다.
“그동안 왕가에 동성애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왕가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저하, 왕가는 백성의 세금으로 유지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왕가에서 쓸데없는 지출을 일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륙의 여러 나라가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십시오. 저하께서는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내가 저하와 결혼하는 것이 어찌하여 쓸데없는 지출이라는 겁니까.” 용사가 말했다.
“두 분이 결혼하시는 것은 곧 후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옵니다.”
“경은 내가 대 잇는 기계로밖에 보이지 않는가.” 왕자는 제 노여움을 잘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소인의 뜻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만약 용사가 나를 구해오지 못했다면 경은 어찌했을 것인가. 왕가의 종사宗嗣를 보전하기 위해 경이 나를 구하러 왔을까? 그렇다면 왜 나는 몇 년간 경의 수염 한 가닥도 보지 못한 거지?”
“그것은 상황이 다릅니다. 설명드리겠습니다. 저하가 돌아오지 못하셨다면 내각은 왕가의 인척에 계승 순위 매겨 적법한 자에게 왕위를 계승케 했을 것입니다. 이 작업은 상당한 예산과 인력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저하가 돌아오셨고 여성을 반려로 맞이하여 자손을 생산하신다면 국가는 예산을 아낄 수 있습니다. 당장 수도 재건 공사도 몇 년이 걸릴 지 모릅니다.”
“적법한 계승자를 찾는 작업이 그리 천문학적인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냐.” 잠자코 듣고 있던 왕이 한 마디 했다.
“예산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필요한가 아닌가를 이야기하는 것이옵니다. 백성이 마련한 예산을 불필요한 곳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까마귀 남작이 말했다.
“혹시 경은 백성을 핑계로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경의 말을 믿지 않는다. 동성애자인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성과 결혼하여 대를 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부터가 잘못되어있으므로. 하지만 뭐 상관 없다. 예산이 불필요한 곳에 낭비되는 것이 싫다면 내가 그 예산이 ‘꼭 필요하도록’ 만들어주겠다.” 왕자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왕자의 신분이 문제라면 나는 그 신분을 포기하도록 하겠다.” 좌중의 술렁거림에도 왕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경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왕족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아닌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 없이는 왕족으로 남아도 그 책무를 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평민으로 남겠다.” 잔뜩 일그러진 까마귀 남작의 얼굴을 보아하니, 왕자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듯하다. 사실 용사도 마음이 뒤숭숭하기로는 까마귀 남작 못지 않았다.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프러포즈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대신들은 까마귀 남작을 도와 당장 위원회를 꾸리고 적법한 계승자를 찾는 일을 시작하라. 그것은 ‘꼭 필요한’ 일이니까.” 왕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곧장 방을 나가버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쏠렸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용사는 왕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히 왕자를 따라갔다.
왕자는 커다란 가방에 여러벌의 옷을 욱여넣고 있었다. 뒤따라온 용사를 보더니 왕자는 대뜸 “내가 왕족이라서 좋아했던 거 아니지?” 라고 물었다.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네가 왕족이 아니라 오렌지족이었어도 나는 만족했을 거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러나 왕자의 목소리는 확실히 누그러져 있었다. 용사는 왕자를 뒤에서 껴안고는 어깨에 턱을 괴었다.
“네가 오렌지족이었어도 나는 만족했을 테지만, 딩크족은 아니었으면 좋겠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히파테카 고원에 멋진 집이 하나 있거든. 거기서 우리 둘이 아이를 입양해서 사는 거야. 남자애 둘이랑 여자애 둘 이렇게 해서.”
“나 이제 왕족 아니라서 완전 빈털터리인데, 애들을 넷이나? 감당할 수 있겠어?”
“괜찮을 거야. 저금해놓은 돈이 있거든. 그게 아니더라도 은안개 있잖아. 내가 받기로 되어있는 거. 적당한 가격에 팔아도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을 걸.”
“근데 나 수도 왕궁에 안 돌아가면 붉은 용이랑 한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야?” 왕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뭐, 붉은 용도 같이 데리고 살면 되지.”
“그렇게 된다면 진짜 기분 이상할 거 같아.”
“네가 너무 잘생긴 탓이라고 생각해.” 용사가 웃으며 말했다. 왕자도 따라 웃었다.
VI.
용사는 주말을 끼고 휴가를 내어 총 사흘간 빈찬토쟁에 머물렀다. 왕자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문무백관이 떼거리로 몰려와 집 앞에서 시위를 하는 탓에 마음 놓고 쉴 수도 없었다.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왕자는 왕자의 지위를 버리지 못했다. 까마귀 남작은 내각에서 물러나야 했다. 남작은 ‘소신을 지키기 위해 물러난다’고 했으나, 물밑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지 용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같이 갈까?” 왕자가 말했다.
“아니, 안 그랬으면 좋겠어.” 용사가 답했다.
“왜?”
“네가 옆에 있으면 의미가 없어지거든.” 그 외에 가타부타 설명을 늘어놓지 않았지만, 왕자는 되묻지 않았다. 용사는 수도에 배치된 병력과 함께 새벽에 출발했다. 유해 수습과 잔해 처리에 반년이 금방 지나갔다. 왕은 공식적으로 수도 수복을 천명하였고, 피어난 꽃들이 수도로 돌아온 백성을 맞이하였다. 그해 봄에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미리 정해놓은 대로 신혼집은 히파테카 고원에 마련하였다. 장을 보려면 말을 타고도 한 시간을 달려야 하는데, 그 점을 제외한다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었다. 수도의 재앙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를 입양하여 사랑으로 길렀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자식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붉은 용은 궂은 날에만 가끔 찾아와 하루 정도 머물다 떠났다. 평상시에 어디서 머무르는지 궁금했으나 굳이 물어보려 하지도 않았다.
왕은 천수를 누리고 여든 둘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국장은 나흘간 치러졌고, 왕자는 왕좌에 앉았다. 왕은 선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국정을 훌륭하게 보살폈다. 그야말로 태평성대였다. 용사는 국서(國壻)의 자격으로 왕궁에 머물렀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들은 이미 출가하여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직 둘째 딸만이 왕위의 적법한 계승자로서 아버지들과 함께 왕궁에 머무를 뿐이었다.
왕이 자신의 딸을 후계자로 지목하였을 때, 내각은 혼란스러워하였다. 후계자의 성별에 여성인 것은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혈육이 아닌 입양한 자식을 왕가의 적법한 계승자가 될 수 있는지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각은 고민 끝에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법적 근거가 없다면 법적 근거를 만들면 그만이다.” 그리하여 왕과 용사의 둘째 딸은 왕위의 적법한 계승자가 될 수 있었다.
노년에 용사는 혼자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왕궁의 정원은 오만가지 꽃으로 아름다워 긴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호위를 물리고 홀로 정원을 걷고 있노라면 가끔씩 붉은 머리칼을 한 꼬마를 만날 수 있다. 정원에만 나타나는 게 아닌지 가끔은 시종이 찾아와 “불이 붙은 듯 새빨간 머리를 한 꼬마가 누더기를 뒤집어쓴 채 돌아다니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 꼬마의 정체는 왕과 용사만이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 왕국에 여왕이 즉위하였다. 혼자 남은 용사는 히파테카 고원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하였다. 가끔 자식들이 손주를 데리고 찾아오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구멍 뚫린 듯 공허한 마음은 쉽사리 채워지질 않았다. 용사는 겨우 몇 년을 더 살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 묻혔다.
유언에 따라 두 사람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지게 되었다.
If we are all in the gutter, it doesn't change who we are.
Because some of us in the gutter are looking up at the st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