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ression of Emily Hildenberg who is the Librarian
[ The library needs more librarian for people. ]
Null.
이것은 도서관 사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I.
에밀리 힐덴베르크 씨의 하루는 좆같습니다. 도서관 지하에서 눈을 떴거든요. 온갖 마도서 사이에서 잠들 수 있다니, 저는 악몽이라도 꿔버릴 거 같아 무서운데요. 하지만 에밀리는 벌써 10년 차 사서! 그런 건 존나 신경도 안 쓴답니다!
“…라고 혼잣말을 해버리는 건 역시 정신분열의 초기 증세일까.” 그녀는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바닥에서 잠들었기 때문일까, 몸 곳곳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이상한 소리를 낸다. 에밀리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소지품을 살폈다. 500번대 중반, 특히 자연사 서가 쪽은 종종 장난기 많은 유령이 출몰하여 소지품을 훔쳐가곤 한다. 혹시 몰라 가방 안쪽까지 확인해보았지만 다행히 없어진 물건은 없는 듯했다. 그녀는 고무줄 두 개를 꺼내 머리를 질끈 묶었다. 못 씻은 지도 벌써 며칠이나 되어, 머리를 만지고 난 손에서 퀴퀴한 냄새가 묻어났다. 에밀리는 애써 그 악취를 무시하며 짐을 챙겼다.
도서관의 지하 서고는 넓고도 무한하다. 수직적으로도 그렇지만 수평적으로 더욱 그렇다. 때문에 열람하고 싶은 자료가 있다면 반드시 사서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 문제는 이곳의 구조를 속속들이 아는 사서가 에밀리 힐덴베르크 혼자뿐이라는 점이었다. 방문객이 요청하는 자료는 모두 그녀가 찾아와야 한다. 이런 처지를 묵묵히 감내하는 것은, 애당초 도서관에 사서라곤 그녀 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도서관은 보유 장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곳 도서관은, 그러니까 La biblioteko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마도서를 추적하고, 책의 주인으로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를 양도받는다. 가끔 무슨 짓을 해도 책을 양도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눈물을 머금고 마도서를 소각해버린다. 뒷말이 돌지 않도록 주인도 함께 처리한다. 양도받은 마도서들이 지하 서고에 영구적으로 봉인된다.
그렇지만 봉인된 마도서 중에서는 학문적인 가치가 뛰어난 서적도 존재한다. 때문에 도서관은 인증된 마법사에 한해서 마도서를 대출해주기 시작했다. 대출 기한은 2주에 기한 연장은 없다. 연체는 곧 죽음이고, 분실 역시 마찬가지. 이러한 까닭 때문인지 자료를 대출하고자 하는 마법사는 생각보다 적었다. 에밀리 혼자서 무리 없이 사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도서관의 인사과장이 사서 충원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요즘 도서관은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으니까, 추가로 사서를 고용할 여력이 없는 거겠지.”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짜증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사서가 몇 명 더 들어온다면 분명 이 엿같은 업무도 한참은 수월해질 텐데. 에밀리는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도서관의 지하 서고로 내려온 것이 벌써 며칠 전의 일이다. 열흘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일주일은 확실히 지났으므로 아마 아흐레쯤 되지 않았을까. 사서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일주일도 안 되어 끝났을 일이었다.
그 날도 에밀리는 도서관의 로비에 홀로 앉아 독서 삼매경이었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이었는데, 집중해서 읽고있는 와중에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큰 키가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깡마른 몸. 금테 안경 너머의 퀭한 눈동자 한 쌍이 허겁지겁 도서관 내부를 살폈다. 에밀리는 이러한 사내의 행동을 십분 이해했다. 아마 그가 상상하던 도서관의 모습과는 많이 다를 테니까.
도서관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단출하다. 적어도 손님이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은 여섯 평도 채 되지 않는, 에밀리가 ‘로비’라 부르는 좁은 사무실뿐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맞은편에 지하 서고로 내려가는 문이 하나 있고, 그 사이에 사무용 책상 하나가 놓여있다. 책상 위로는 구식 CRT 모니터와 몇 가지 서류들. 창문 없는 양쪽 벽에는 괴상하게 생긴 날붙이가 가득하다. 확실히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도서관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에밀리가 꼽는 도서관의 가장 특이한 점은, 도서관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직원들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차원과 차원 틈새에 끼어있을 수도 있고, 아예 차원 바깥 어딘가에 격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도서관이 어디 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방법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어디에서든 찾아올 수 있으니까. 세상 모든 문이 도서관의 정문이 될 수 있다. 다만 실수해서 전혀 다른 세상의 문을 열어버린다면…. 그 끔찍한 상황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도서관 방문이 처음인지 사내의 발걸음은 어딘가 어색했다. 아무래도 긴장하고 있는 듯하여 에밀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세상 모든 마도서가 여기 보관되어있다고 들었는데요.”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잘못 들으셨네요. 누가 그런 거짓말을.”
“아니요, 제대로 듣고 왔습니다. 꼭 필요한 마도서가 여기 있다고. 엘트다운 사본 11세기 판본—.”
“—뭐 이 씨바놈아? 앗, 실수. 손님에게 욕하면 안 되지. 죄송해요 이 미친놈아.” 사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욕설이 먼저 튀어나왔다. 진심 가득한 한 마디였다. 너무 진심이라서 말하는 에밀리 본인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엘트다운 사본은 900번대 서가에 꽂혀있다. 당장 출발해도 하루 이틀 만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에밀리는 이 손님이 얼른 단념하고 후딱 꺼져줬으면 싶었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책을 빌리러 왔잖아요. 난 책 빌리러 온 사람이 제일 싫어.” 그녀는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사내가 여기 정말 도서관 맞느냐고 물었지만 에밀리는 그 질문마저도 무시했다.
“손님, 리얼루다가 그 책을 원해요? 존나 세상이 두 쪽 나도?”
“정말 필요해요. 연구를 진행하는 데 없어선 안 될 책이란 말이에요.”
“님 불알이 두 쪽 나도 꼭 그 책을 봐야겠어요?”
“…불알은 원래 두 쪽인데요.”
“아, 그랬던가. 제가 불알을 못 가져봐서.” 에밀리는 한껏 밍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지만 해야하는 일이니까. 백팩에 이것저것 쑤셔넣고, 벽에 걸린 무기 중 가장 흉악한 녀석을 집어들었다.
“2주 뒤에 다시 오세요.” 그녀는 유언처럼 한 마디를 남기고 지하 서고로 내려갔다. 그 날 이후로 아흐레가 지난 것이다.
사실 단지 책만 찾아오고 끝날 일이었으면 이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최단거리 잡고 출발했으면 일주일 안으로도 끝낼 수 있었다. 다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동안 반납받은 책을 서가에 정리해놔야 했으니까. 덕분에 경로가 상당히 복잡하게 꼬여버렸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지하에서 떠돌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절반은 에밀리의 잘못이지만, 이럴수록 다른 사람 탓을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래도 열심히 돌아다닌 결과 이제 마지막 책 한 권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의 괴이한 것들을 해부하면서 쓴 ‘동물이 아닌 것에 관하여’라는 이름의 책. 원본은 그리스어로 쓰였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 책은 원본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그걸 다시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번역과 번역의 행간에서 원본의 문장은 그 뜻을 많이 잃었겠지만, 그럼에도 종종 이 책을 찾는 마법사가 나타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귀찮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하다.
“아리스토 꼬맹이는 요새 뭐 하면서 지내려나.”
이 책이 있어야 할 곳은 590번대 동물학 서가 쪽. 지금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구역이었다. 박차를 가하면 한 시간 반 만에 주파할 수도 있는 거리.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얼마나 걸릴까. 에밀리 힐덴베르크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방이 흔들리지 않도록 꽉 조여 매고,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아득히 떨어진 곳에서, 그녀 혼자뿐이어야 할 지하 서고인데도, 맹수의 울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잘못 들은 거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소리가 너무나도 분명했다.
“아아, 왜 하필 이 타이밍인 건지. 이번에도 부디 별 탈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그보다 도서관 사서가 이런 거까지 해야 해? 이런 건 자료관리팀에서 처리해줘야 할 문제잖아!” 에밀리는 분노에 휩싸인 채로 전방을 경계했다. 기척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II.
흉포한 괴물과 맞닥트리게 될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순간이지만, 에밀리의 정신은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이었다.
도서관이 ‘물리적으로’ 어디에 존재하는지 아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위치를 몰라도 방법만 알고 있다면 세상 모든 문이 도서관의 정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도서관의 문을 여는 방법이 너무 쉽다는 데 있었다. 상식과 부끄러움을 갖춘 사람이라면 시도해볼 생각조차 해본 적 없을 동작이 여럿 섞여 있지만, 실제로 해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문을 열 수 있다. 그곳에 문이 달려있다면 설령 지옥이라 해도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옥에서 온 듯한 괴물들이 종종 지하 서고에 출몰하곤 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연의 일치 이리라. 그런 괴물들 마저 우연히 문을 열어버릴 수 있을 만큼 방법이 쉬운 것이다!
에밀리는 문 여는 방법을 이따위로 설정한 녀석을 콱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미 죽어서 가루조차 남지 않았을 테지만. 분명 도서관의 창립자 중 누구 하나가 ‘귀찮으니까 대충 정하자’고 했겠지. 그 때문에 누가 고생하게 될지는 생각도 안 하고. 도서관의 문을 여는 방법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어려웠어야 했다. 그래야 서고에 괴물이 떨어지는 일도 없고, 손님이 찾아와 귀찮게 구는 일도 없었을 텐데.
“젠장, 나쁜 건 창립자 놈들의 대가린데 고생은 왜 내 몸이 해야 하냐고!” 분노가 갈 곳을 잃어서 괜스레 언성만 높아졌다. 그 소리를 듣고 녀석은 에밀리를 향해 똑바로 달려왔다.
신화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생기발랄한 미노타우로스였다. 일단 기본적으로는 그러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으므로 이 녀석을 미노타우로스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 같았다. 소의 대가리가 붙어있어야 할 자리에 코뿔소의 그것이 붙어있었으니까, 일단 정석적인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코뿔소 대가리 붙은 바리에이션을 뭐라 불러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 코뿔소는 말에 더 가까운 동물이지만, 그 생김새가 소와 크게 다르지도 않아서, 에밀리는 그냥 미노타우로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눈앞의 미노타우로스는 상당한 근육질이었다. 군데군데 금속으로 처리한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제대로 맞으면 형태도 남지 않고 으스러질 터였다. 에밀리는 칼을 눈높이까지 치켜들고,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저 높은 곳에 달린 미노타우로스의 두 눈깔이 에밀리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목적성이 분명했다. 그녀는 며칠 굶은 괴물 앞의 요깃거리쯤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런 처지가 에밀리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Se vi venas de tre evoluinta civilizita socio, chu vi povas solvi la problemon per konversacio?” 그녀가 말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꺼낸 제안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문명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는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칼을 들고 있었지만 막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에밀리는 빠르게 몸을 피했다. 몽둥이가 바닥을 때릴 때, 돌가루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지간하면 맞서 싸워볼 생각이었다. 칼 놀리는 솜씨가 서투르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저따위 미친 괴물이 튀어나와 버리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닥치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미노타우로스의 크기는 에밀리의 두 배쯤 되었고, 보폭도 거기에 비례하였다. 그러나 녀석을 따돌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가의 형태나 배치에서부터 통로의 불규칙한 연결까지도 전부 꿰뚫고 있었으니까. 요컨대 지하 서고 전체가 그녀의 손바닥 안이나 다름없었다.
에밀리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어느 서가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코뿔소 대가리가 아직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기척까지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가방 안에 들어있던 연필 한 자루를 꺼내 부러트렸다. 일종의 구조 요청. 도서관 지하의 시간은 정체되어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한 시간 안에는 구조대가 올 터였다. 어쩌면 미노타우로스보다 구조대 녀석이 더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건 나중 가서 고민할 문제였다.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려면 일단 살아있어야 하는 건데…….” 다행히 상황은 낙관적이었다. 에밀리는 주변을 살폈다. 미노타우로스는 다른 곳으로 가버린 듯했고,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대로 한 시간 버티는 건 일도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늘 예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미노타우로스는 서가 위를 뛰어다니며 에밀리의 흔적을 찾았다. 발각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번에도 잽싸게 도망치려 했지만, 녀석의 몽둥이가 한 발 빨랐다. 에밀리는 야구공처럼 날아가 먼 곳의 서가에 내리꽂혔다. 홈런이었다. 끔찍한 고통에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녀석이 달려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주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옆구리의 갈빗대 몇 개가 아직 난 듯싶었다.
“으아아 아파 뒤지겠잖아 이 코뿔소 대가리 새끼야!” 그녀는 이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칼이 지팡이를 대신했다. 그 앞으로 미노타우로스가 재앙처럼 내려앉았다. 에밀리는 서가에 등을 기댄 채 칼을 들어 녀석을 겨누었다. 칼끝이 심하게 흔들렸다. 옆구리의 통증이 점점 심해져서, 도망치기는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여기서 끝장을 봐야 할 듯했다.
제아무리 괴물 같은 녀석일지라도 어찌 되었든 몸뚱이는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칼로 푹 찌르면 억 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몽둥이를 휘두르고 난 뒤를 노려 깊게 찔러넣는다. 몸 상태가 만신창이라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통증을 잊기 위해서, 그녀는 깊게 심호흡했다.
미노타우로스는 온 힘을 다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허공을 찢어발기는 듯한 맹렬함. 에밀리는 거의 고꾸라지듯 몸을 피했고, 녀석의 몽둥이가 그녀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과격한 움직임에 옆구리의 통증이 더욱 심해졌지만, 그녀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몽둥이를 휘두르는 제힘에 못 이겨 미노타우로스는 휘청거렸고, 덕분에 곳곳이 빈틈이었다. 에밀리는 그 빈틈으로 달려들어 녀석의 배 한복판에 칼을 찔러넣었다.
“꾸웨에에에에에에에에!!”
“……이건 또 무슨?!”
손가락 한 마디만큼도 채 뚫고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칼날이 반으로 부러졌다. 부러진 칼날이 그녀의 어깨를 베고 지나갔고, 뒤이어 코뿔소 대가리가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나 마땅히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 에밀리는 몸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녀석에게 오른팔을 물렸다. 팔꿈치 근처에서 무언가가 영원히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화들짝 놀라 재빨리 뒤로 물러났지만, 그녀의 오른팔은 여전히 녀석의 아가리 속이었다.
뜯겨나간 오른팔의 단면에서 줄기차게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에밀리는 지혈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으나, 녀석은 낚아채듯 에밀리의 다리를 붙잡았다.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무의미한 발악이었다. 코뿔소 대가리가 아가리를 벌렸다. 새카만 목구멍이 꿈틀거린다. 에밀리는 발광하듯 비명을 질렀지만 녀석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결국 녀석은 산 채로 에밀리를 집어삼켰다. 몸의 모든 부분을 끊어내는 듯한 고통 속에서 에밀리는 울부짖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어금니로 그녀의 머리를 으깨버리고 나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입안이 조용해지자 녀석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에밀리의 살과 뼈를 음미했다. 한 입 거리였지만 짭짤하니 먹을 만했다.
그러나 에밀리를 다 먹고도 배가 차지 않아서, 미노타우로스는 다시금 지하 서고를 어슬렁거렸다. 다음번에는 좀 더 크고 먹을 게 많은 녀석이 나타나주기를 기대하면서.
III.
도서관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마도서를 추적하고, 책의 주인으로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를 양도받는다. 가끔 무슨 짓을 해도 책을 양도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는 눈물을 머금고 마도서를 소각해버린다. 뒷말이 돌지 않도록 주인도 함께 처리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수행하는 직원을 도서관에서는 ‘파쇄기’라고 부른다.
로라 메므낫은 파기 3반 소속의 파쇄기였다. 그리고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파쇄기의 특성상 사람을 산채로 불태우고, 흔적조차 남지 않게 찢어 죽여야 하는 일이 잦다. 이런 일은 메므낫의 적성과 잘 맞아 떨어졌다. 찢어 죽이는 것보다는 불태우는 쪽이 그녀의 취향이었다. 타오르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까닭 모를 희열에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그런데 요 몇 달간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다들 너무 고분고분하게 마도서를 넘겨서, 아무도 불태우지 못했다. 덕분에 메므낫은 귀가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사람 죽이는 맛에 다니는 직장인데, 그 맛을 느낄 수 없다면 굳이 붙어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가 심각하게 이직을 고민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였다.
“메므낫 씨, 그 얘기 들었어? 인사과장이 파기 1반과 2반을 통합하고 파기반 전체에서 절반 쯤 해고할 거라던데.” 옥스턴 칼브레가 말했다. 파기 3반에서 가장 농땡이 피우기를 좋아하는, 요즘 말로 월급 루팡의 화신 같은 양반이었다.
“하는 김에 저도 해고시켜줬으면 좋겠네요.” 로라 메므낫의 본심이었다.
“에이, 메므낫 씨는 농담도 참.” 칼브레는 그렇게 웃어넘기고는 다른 말로 이어갔다. 그 와중에 멀쩡하던 연필 한 자루가 똑 부러졌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메므낫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종의 구조 요청. 그녀는 칼브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팀장 놈의 자리를 살폈다. 콧수염쟁이는 제 자리에 앉아 신문이나 보고 있었다.
구조 요청이긴 하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일종의’ 구조 요청이니까. 사정을 설명하면 보내주기야 하겠지만, 팀장 놈 성격상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터였다. 그녀는 옥스턴 칼브레를 자리로 돌려보내고 상황을 살폈다. 신문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신문 읽는 척하면서 낮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몰래 다녀오려면 지금이 기회다. 메므낫은 가죽 재킷을 챙겨 들고 조용히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현장에 도착한 즉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방, 부러진 칼의 조각, 핏자국 같은 것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유추할 수 없었다.
로라 메므낫은 생각했다. 에밀리 힐덴베르크는 도서관 내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다. 적어도 칼 쓰는 솜씨 하나로는 견줄 사람이 없다. 그런 에밀리가 구조 요청을 보낼 정도라면 상당히 번거로운 상대를 만났다는 뜻일 터였다. 메므낫은 탐색 마법을 펼치고 가능한 멀리까지 살폈다. 지하 서고에 깔려있는 온갖 마법들 때문에 노이즈가 상당했지만, 그녀는 움직이는 무언가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미노타우로스였다. 아니, 미노타우로스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하다. 소의 대가리가 붙어있어야 할 자리에 코뿔소의 그것이 붙어있었으니까. 저걸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대뜸 녀석이 몽둥이 들고 달려들었다. 맹렬하고 저돌적이면서도 매우 일차원적인 돌진이었다.
그러나 메므낫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왼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녀석에게 향한 채로 천천히 손가락을 한데 모은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미노타우로스는 더이상 그녀에게로 접근하지 못했다. 마치 두꺼운 유리벽으로 가로막힌 것처럼. 서가에 걸려있는 보호 마법을 확대적용했을 뿐인데, 들인 수고에 비해 효과가 뛰어나다. 메므낫은 매우 흡족해하며 미노타우로스에게로 다가갔다.
“우리 언니 해코지 한 게 네 녀석이냐?” 로라 메므낫이 말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사실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기든 아니든 어차피 죽여버릴 거였으니까. 그녀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불태워버리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
하지만 녀석이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리도 없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온 힘을 다해 유리벽에 몸을 던졌고, 그럴 때마다 보호 마법이 위태로울 정도로 출렁거렸다. 그녀는 서둘러 녀석의 사지를 뜯어버리고자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튀어나왔다. 보호 마법에는 방향성이 없어서, 메므낫의 마법은 미노타우로스까지 닿지 못했다. 그녀를 보호해주던 것이 이제는 녀석을 지켜주는 꼴이었다.
“뭐야 결국 임시방편도 못 되는 거였잖아.”
“꾸웨에에엣!!” 단순한 외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합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녀석은 제 대가리에 돋아난 한 줄기 뿔에 온 무게를 실어 달려들었다. 보호 마법이 한계까지 늘어났다가, 마침내 찢어지고 깨어졌다. 그러나 녀석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한 점에 집중된 힘으로 메므낫을 꿰뚫어버리려는 듯했다. 가죽 재킷이 아무리 비싸도 저걸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메므낫은 오른손을 휘둘러 미노타우로스의 위치를 반의 반 바퀴 정도 돌려버렸다. 녀석은 달려오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가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서가에 걸려있는 보호 마법은 그녀가 확장시킨 임시방편과는 다르다. 미노타우로스는 단단한 벽에 대가리를 처박은 듯한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꾸만 휘청거리는 까닭에 조준이 쉽지 않았지만, 메므낫은 어렵지 않게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녀는 눈깔이 돌아간 채로 몸부림치는 미노타우로스를 지켜보며 행복했다. 몸부림치며 사방 모든 것을 부수려 들었지만, 그것마저도 아름다운 소리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하모니를 이룬다. 권태로웠던 지난 몇 달을 단숨에 만회하는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불을 붙여놓은 것과는 별개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녀석의 가슴팍이 간헐적으로 솟아올랐다. 마치 에일리언 시리즈의 ‘체스트 버스터’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메므낫은 서둘러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 명확한 지휘에 맞춰 미노타우로스의 팔다리가 어디 묶인 듯 고정되었다. 녀석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대었다. 가슴팍의 솟구침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녀석의 가슴팍을 찢고 팔 하나가 솟아났다. 부러진 칼자루를 꽉 쥔 손이었다. 그 손은 달걀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꾸준하고 성실하게 미노타우로스의 가슴팍을 찢어발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노타우로스는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게 되었고, 사람 하나가 녀석의 가슴팍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반쯤 잿더미가 된 시체의 풍경과 맞물려 그녀의 모습은 흡사 죽음에서 돌아온 불사조처럼 보였다.
“앗 뜨거 씨바!” 에밀리 힐덴베르크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녀석의 가슴팍에서 뛰쳐나왔다. 사방에서 뻗쳐오는 열기에 한 시라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언니, 내가 구하러 왔어!” 로라 메므낫이 말했다.
“이렇게 되기 전에 구해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에밀리가 한숨처럼 말했다. 다만, 불평하는 것은 아니었다. 메므낫이 겉표면을 바삭하게 구워준 덕분에 찢고 나오기가 한결 수월해졌으니까.
“아주 그냥 난리도 아니네. 피에 살점에…. 뭐 닦을 거라도 가져다 줄까?”
“그냥 나를 너네 집 욕실로 데려다주면 안 되냐.”
“미안, 언니. 그건 내 능력 밖에야. 나 혼자 이동하는 것도 벅차거든.”
“그럼 내 가방이라도 좀 가져다줘.”
“씻을 물 같은 건 필요 없어?”
“뭐 며칠 안 씻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에밀리가 말했다. 죽음에서 방금 돌아온 사람이 하는 농담이라 더 가슴에 와 닿는 데가 있었다. 어차피 곧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오래 시간을 쓸 수도 없다. 메므낫은 가방만 가져다주고 서둘러 사무실로 복귀했다. 콧수염쟁이가 깨지 않도록 그녀는 최대한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어, 왔냐.”
팀장 놈이 두 눈 시퍼렇게 뜬 채로 메므낫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노타우로스 앞에서도 멀쩡했던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IV.
에이몬드 마르카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로비의 풍경은 2주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만 한 사람, 사서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에이몬드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그녀는 가방에 칼 한 자루를 들고서 유언처럼 한마디 말을 남긴 채 책을 찾으러 떠났다. 그 이후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책을 찾으러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일까. 그는 기대를 품은 채로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고 쪽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그는 당연히 사서 아가씨가 돌아온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전혀 상상해본 적도 없는 존재였다.
“무슨…, 으으아아아?!” 에이몬드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괴물이었다. 넝마조각같이 잔뜩 해진 옷에 피를 뒤집어쓴 듯 온몸에 피딱지가 붙어 있었다. 인간의 형태를 흉내 내고 있었지만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악취는 숨길 수 없었다. 괴물은 천천히 에이몬드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의 입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멎어버릴 거 같았다.
마법사이긴 하지만, 괴물을 죽일 만큼 대단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이몬드는 도서관을 방문한 이유조차 망각한 채 도망쳤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네발로 기어야 했다. 해석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비명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지?” 에밀리 힐덴베르크는 당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CRT 모니터에 비친 모습을 보고 나서야 좀 알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헛웃음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보고 도망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내가 지 때문에 무슨 개고생을 했는데! 기왕 왔으면 책이라도 받아가던가! 2주 동안 고생한 게, 으아아 열 받아!” 에밀리는 가방을 집어 던지며 분통을 터트렸다. 당장이라도 쫓아가서 패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도서관의 문은 자신이 열었던 곳으로밖에 나갈 수 없다. 이날 에밀리의 경우에는 그녀의 집으로 밖에 갈 수 없었다. 분노가 이성을 집어삼켜서, 그녀는 도서관장에게 메모 한 줄 남기고 멋대로 퇴근해버렸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갈 곳 잃은 분노는 점차 우울함으로 바뀌어갔다. 2주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버린 꼴이었으니까. 그동안 까뮈의 글을 읽었다면 세 권은 족히 해치울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울한 점은 내일도 출근하여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복권에라도 당첨되지 않는 이상, 도서관 사서 에밀리 힐덴베르크의 우울은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