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laide Shakespeare
[ There is no escape from the GuestHunter ]
V.
고장난 무릎은 단숨에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사원의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낑낑거리며 어긋난 부분을 끼워맞췄다.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팠지만, 그마저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격통이 무릎을 찔러대었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산길을 내려가려니 이것 참 죽을 맛이다. 결국 나는 점심 먹을 시간을 한참 지나서야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원찮게 걷는 내 모습을 보더니 사내가 걱정스럽게 상태를 물었다.
“무신 일이요. 사원에서 자빠지기라도 해쓰요? 파쓰 피료함 얼렁 말혀야. 내 집에서 가따주꾸마.”
“그런 건 아니고요, 원래 무릎이 좀 안 좋아서. 얼마 있다 보면 또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그 정도로 에둘렀다. 환영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말하기 껄끄러웠으니까.
사내의 집에서 욕실을 빌리고 가게 위 다락방으로 돌아왔다. 조용하여 혼자 생각에 잠기기 좋았다. 나는 밥 생각도 잊고 은빛 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이 깊어질수록 되려 혼란스러워지기만 할 뿐이었다. 만약 조교수 해머즐리 씨가 같이 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애당초 그 양반은 왜 나에게 멕시코시티 세미나를 양보한 걸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고민은 또 다른 고민을 불러올 뿐 마땅한 답을 내놓는 일이 없었다.
뭐라도 마실까 싶어 가게로 내려왔다. 문을 열었지만 아직 손님이 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사내는 가게 구석에 달아놓은 TV로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쏘아대는 스페인어 중계는 알아들을 수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 적막한 것보다야 시끄러운 게 나으니까. 나는 바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쟌 말고 뱅으로예? 그 마이 비쌀틴데. 여 키뿌도 몬하는데 괜찮켔으야?”
“괜찮아요. 다 못 마시면 가져가죠, 뭐.” 평소 마셔보고 싶었던 고급 위스키를 주문했다. 어차피 영수증으로 비용처리 할 생각이었기에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을빛으로 시끌벅적한 바에서 나는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술은 고민과 같아서 첫 잔이 다음 잔을 부르고, 다음 잔이 새로운 잔을 불러서 병의 밑바닥을 보게 만든다. 그러나 위스키 한 병을 다 마시도록 나는 취하지 못하였다.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 잊은 채 잠들고 싶어 계속해서 퍼마셨으나, 그럴수록 은빛 뱀에 대한 생각은 깊어져만 갈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은 들불처럼 번져 까맣게 잊고 있던 그녀에게로 닿았다. 나는 왼손으로 턱을 괸 채 반쯤 남은 술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커다란 은빛 뱀을 혼자 힘으로 막아선 정체불명의 여자. 그녀는 환상의 일부였음에도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분명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딘가 이질적이었고 그래서 더욱 사실적이었다.
“와 글케 한숨을 뿍뿍 쉬고있능교. 마 무신 고미니라도 이쓰야?”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요고 확 때리붓고 바께 산뽀라도 다녀오능거 으뗘?” 사내는 데킬라 한 잔을 내밀었다.
“이건 아저씨가 사는 거죠?” 나는 가볍게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아녀라, 저짜게 아가씨가 사는기여. 분위기 조아보이는 듸 열씨미 해보이.” 사내는 손가락으로 바 테이블의 반대쪽을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가자 거기에 웬 여자 하나가 나를 보며 가볍게 술잔을 흔들고 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고무줄로 질끈 묶은 새빨간 포니테일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얼굴이야 많이 다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셰익스피어 교수와 비슷하다. 세상을 가로질러온 자의 여유만만한 표정이 그녀에게도 있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상당한 술고래인지 발치에는 벌써 데킬라 병이 몇 개나 나뒹굴고 있다.
“다…, 당신!!” 하지만 내가 놀란 까닭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알아? 그럼 말이 좀 통하겠네.” 그녀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아까 지하 사원에서!’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앞뒤가 맞질 않았으니까.
나는 무례하다싶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커다란 은빛 뱀을 혼자 힘으로 막아선 정체불명의 여자. 그녀는 분명 환상의 일부였음에도 지금 내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어떻게든 납득해보고 싶은데 뭐 하나 말이 되는 게 없었다. 자꾸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기, 내 말 듣고 있는거야?” 그녀가 물었다.
“듣고 있어.” 듣고 있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별 관심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현실일 리 없다. 사원 지하의 환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위스키를 마시다 곯아떨어졌고, 이 모든 건 내 꿈일지도 모른다. 슬쩍 허벅지 안쪽을 꼬집어보니 아프기는 했지만 확실히 평소보다는 덜했다.
“그래서 자기는 절대 안 간다고 자꾸 그러시더라. 대신 너한테 부탁해보라 하시던데.”
“뭘 부탁하려고?” 내 질문에 그녀는 눈을 부라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잘못한 게 없지는 않지만, 잘못한 것보다 더 많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안 듣고 있었으면서 듣고 있다고 한 거였어?” 그녀가 말했다. 문득 그녀의 발음이 마을 사람들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뉴스페인 사투리를 구사하는데, 그녀의 발음은 오히려 스페인 본토에 더 가까웠다.
“밤중에 사원 가면 저주받는다고 절대 안된다는 거야. 근데 너도 사원 가는 길 안다며.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길 안내 좀 해주라.”
“지금 당장? 아무것도 안 보일 텐데 왜 굳이 이 시간에?”
“그야 사원 구경하러 온 게 아니니까 그렇지. 오늘 밤 아니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걸 어느 세월에 기다리고 있어.”
“뭐하러 가는데.”
“은빛 뱀 사냥하러.” 그녀의 말에 나는 깊게 생각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모든 건 꿈일 텐데 뱀을 사냥하든 코끼리를 사냥하든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얇은 잠바를 집어 들고 가게를 나왔다.
“저기, 계속 저기라고 부를 수도 없으니 이름 물어봐도 돼?” 그녀가 물었다. 이럴 때는 본명을 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내 이름은 한국 사람도 발음하기 어려워한다. 본명 알려줬다가 의도치 않게 여럿 당황시킨 전력이 있는지라 자연히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아르덴 베이커. 덴이라고 불러도 좋고.”
“멋진 이름이네.”
“……그거로 끝이야?”
“뭘 더 바래. 박수라도 쳐줬어야 했나.” 그녀는 영혼없이 와아—하며 박수를 쳤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보통 이런 흐름이면 네 이름도 알려주는 거 아닌가 싶어서.”
“뭐야, 아까 나 안다고 하지 않았어? 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그녀의 착각에는 내 책임도 있다. 사원 아래서 보았던 환상과 그녀의 얼굴이 너무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환상 속의 그녀가 꿈에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알프레아 란타노 헉슬리. 딱히 줄여 부를만한 이름은 없네.” 그녀가 말했다. 적당히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걷다보니 어느덧 우리는 마을을 빠져나와 숲길 한복판이었다.
밤에 온도가 뚝 떨어져 숲은 안갯속이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 발밑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길을 익혀두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숲속을 헤매게 되었을 터였다. 나는 걸음을 조심하며 수풀을 가로질렀다. 어둡고 고요한 가운데 사원은 실루엣으로만 존재했다. 안개는 사원이 뿜어대는 중압감까지도 집어삼키고 있는 듯했다.
안이나 밖이나 어두운 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애먼 곳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낮에 닫아놓지 않았던 까닭에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린 채였다. 덕분에 찾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
“고마워. 이제부터는 혼자서 할 수 있으니까 돌아가도 괜찮아. 혹시 밤길 무섭다고 요 앞에서 기다릴 거 아니지?” 헉슬리가 말했다.
“아니, 나도 내려가려고 했는데.”
“너 저기 아래에 뭐가 있는 줄 알고 하는 소리야? 내가 은빛 뱀을 사냥한다고 해서 무슨 아나콘다 같은 거 잡으러 온 줄 아나 본데, 그런 거 아냐. 설명은 못 해주겠지만 어쨌든 돌아가.”
“나도 그거 어떻게 생겼는지 알거든.” 사실을 털어놓지 않고 헉슬리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셰익스피어 교수의 죽음과 내가 여기 온 이유, 사원 지하에서 봤던 환영까지도. 짧게 간추려서 이야기했음에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헉슬리는 끝까지 차분하게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럴 리가 없어. 어떻게 평범한 글쟁이가 은빛 뱀을….”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봤어. 내가 거짓말 하는 거 같아?”
“네가 은빛 뱀을 보았고 지금 말한 게 전부 사실이라 해도 사냥하는 데 데려가줄 수는 없어. 너 같은 녀석 있으면 방해밖에 안 된다고.”
“나 같은 녀석이 무슨 녀석인데.” 내가 물었다.
“다리 장애인.” 돌아오는 대답이 퍽 간단했다. 간단해서 더욱 반박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려 했다. 그러나 얼굴 근육이 굳어 제대로 표정이 지어지질 않았다. 지금 내 표정은 얼마나 꼴불견일까.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작품도 영 아니다 싶습니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많이 부족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부족한지…….”
“문장과 문단과 캐릭터의 개성과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 밖에 할 대답이 없었다.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카페를 나왔다. 거리는 한산했고, 머릿속은 복잡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쉬지 않고 글만 써왔는데,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가망도 보이지 않았고 희망도 그랬다. 누나의 말을 따를 걸 그랬나.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서 연구직을 알아볼까.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걸었다. 걸었던 기억밖에 없다.
그다음 기억으로는, 바닥에 누운 채로 올려다본 하늘이었다. 나는 들것에 실려있었고, 실려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저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의사는 자꾸만 내게 정신 차리라고 다그쳤다. 드라마처럼 뺨을 때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뺨을 때렸지만 내가 느끼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보호자 동의서에 서명한 건 누나였다. 나는 누나로부터 사고의 진상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페라리가 인도를 습격했다. 운전자는 만취 상태였다. 나는 그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괴로워하기를 바랬지만, 운전자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 현장에서 죽은 사람은 운전자 말고도 한참 있었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누나는 말했다. 평생 다리 병신으로 살아야 하는 내게 운이 좋다고 누나는 말했다. 나는 차라리 죽었으면 했다.
다리에 수술의 흔적이 뚜렷했다. 수술은 몇 달에 걸쳐 계속되었다. 마지막 수술이 끝났을 때, 큰 수술 받느라 고생했다고 간호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 큰 수술도 내 다리를 고쳐놓지는 못했다. 무릎 아래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감각은 살아났으나 근육이 크게 망가진 것 같았다. 무릎의 어떤 기관에 손상이 생겨서 그렇다고 의사는 말했다.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아니었다. 재활 치료를 계속하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의사는 덧붙였다.
재활 치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리에 근육이 붙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지만, 무릎이 문제였다. 걸을 때마다 격통이 찾아왔다. 한 걸음이 다른 걸음을 부르지 못해 주저앉기 일쑤였다. 의사는 더 이상의 재활이 내게 무의미하다고 선언했다. 그 대신 무릎에 이상한 기계를 채웠다. 외골격 관절이 내 무릎 움직임을 보조해줄 거라고 했다. 값은 누나가 대신 치러주었다.
이후로 나는 무릎에 기계 장치를 달고 살아왔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걸 달지 않으면 내 왼쪽 다리는 없느니만 못한 처지였으니까. 가끔 제멋대로 고장 나곤 하지만, 몇 시간 정도 가만히 있다 보면 또 괜찮아진다. 새로운 걸 사면 해결되겠지만 문제는 그럴 돈이 없었다. 계속되는 퇴짜에 원고는 돈이 되지 못했다. 주말마다 영어 과외를 하는 것으로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돈을 번다. 이틀에 한 끼 먹으면 다행인 수준이라, 나는 담배도 끊어야 했다.
“하여튼 난 멀쩡해. 이런 고물 하루이틀 달고 다닌 것도 아니고, 문제 생기면 응급처치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아까 다락방에서 완벽하게 점검했으니까 괜찮을거야.” 내가 말했다.
“…아휴 모르겠다. 네가 죽는 거지 내가 죽는 거냐. 니 맘대로 해라. 하지만 난 분명히 경고했다. 나중 가서 딴소리하지 마.” 어차피 죽으면 딴소리도 못하는 데 뭘 걱정하냐고 말하려다 참았다. 괜히 딴지 걸면 진짜 쫓아낼 거 같았으니까. 때와 장소를 알고 눈치껏 행동하는 것이 내 몇 안되는 장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