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laide Shakespeare
[ There is no escape from the GuestHunter ]
VI.
계단의 경사가 가파른 탓에 최대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삐끗한다면 그대로 실족사할 높이였다. 나는 내려오는 도중에 잠깐 멈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침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계단 하나 덜렁 있는 텅 빈 공간. 틈새에서 스며들어오는 빛이 이 공간을 비추고 있지만, 정작 은빛 뱀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문득 무서워졌다. 이해할 수 없다 해서 불가능한 건 아니라지만, 이번만큼은 그 말에 수긍하기 힘들었다. 바깥은 달도 별도 없는 심야에 안개마저 자욱하게 끼어있다. 그런데도 이곳 지하는 여전히 대낮처럼 밝다니.
“그야 당연하지. 여기는 지구가 아니니까.” 내 물음에 헉슬리는 간단하게, 혹은 지독히도 불친절하게 대답했다. 이래서야 의문이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머릿속이 더 복잡해져버린다. 제대로 된 설명 듣기는 글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헉슬리가 대뜸 바닥에 의미 모를 숫자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두 줄짜리 수열이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0123456789
9876543210
“세상은 0부터 9까지 순서대로 흘러가게 되어있어. 절대로 건너뛸 수 없지. 그런데 윗줄의 4에서 문제가 생기는 거야. 같은 줄의 5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바로 아래의 5로 내려갈 것인가. 이 지점이 겹쳐진 공간을 이동하는 틈새가 되는 거야.”
“우리가 있는 바로 여기가 아랫줄의 숫자 5인 셈인거고. 대충 알 것 같아.”
“보통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것 뿐이고, 실제로 이 세계는 여러 차원이 완벽하게 동일한 장소에 겹쳐있어. 이렇게 차원 사이에 틈새가 생기면 이동할 수도 있고.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단 말이지…….” 이번에는 헉슬리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면 헉슬리는 내가 은빛 뱀을 보았다는 말에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서로 다른 차원이 일반적으로는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은 특이 케이스라는 뜻일까. 나는 겹쳐진 차원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묻고 싶었으나, 그녀가 도중에 내 말을 가로막았다. 환상은 예고도 없이 시작되었다.
아침에 보았던 것과 내용은 비슷하지만, 전체적인 구도나 시점이 조금씩 달랐다. 이 소란스러운 환상의 끝에 은빛 뱀이 나타날 터였다. 나는 언제든 몸을 피할 수 있도록 계단 근처에서 머물렀다. 빗발치는 총탄과 흩날리는 살점이 잦아들고 풍경은 다시 동굴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은빛 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 “아르덴 베이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애들린?”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의 관을 내가 묻었다. 절반이 사라진 그녀의 시신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는 살아있을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명백히 살아있는 그녀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문득 이 모든 것이 몰래카메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셰익스피어 교수의 시신은 직접 본 것이 아니고, 관 뚜껑을 열어본 적도 없으니까. 장례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비행기 티켓을 보내줬을 때 눈치챘어야 한다. 알렉스 해머즐리가 나를 멕시코시티로 보낸 것은 이래서였나! 왜 그들이 내게 이런 짓을 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다. 그 외의 모든 논리가 무의미했다.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나를 헉슬리가 붙잡았다.
“멍청아, 뭐하는 짓이야. 죽으려고 작정했냐?”
“놔 이거! 마음대로 하라며 갑자기 왜 붙잡는 건데!”
“야 아무리 그래도 눈 앞에 빤히 보이는 데 그걸 가만히 놔두겠냐. 내가 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말했다. 붙잡는 손목을 뿌리치려 들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손아귀의 힘이 장사다. 내가 더욱 거칠게 반항하자 헉슬리는 나를 자빠트리곤 그 위에 올라탔다. 자꾸만 몸부림치는 나를 제압하기 위해 그녀는 내 두 팔을 꺾어 등 뒤에서 붙들었다.
“너도 보일 거 아냐. 저기 있잖아…!” 나는 거의 흐느끼듯 말했다.
“저 여자? 저 여자가 네가 말한 그 교수였냐. 미안하지만 저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여기 지구가 아니라고 말했잖아.” 헉슬리가 말했다. 그 말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나는 엎드린 채로 고개만 겨우 들었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는 여전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저기 보이잖아! 있잖아!”
“아까 나타났던 환상들이랑 다른 게 아냐. 그저 죽기 전의 모습이 여기 남았을 뿐이지.”
“나를 보고 있잖아! 나를 보고 있다고! 나를 보고 있는데 저게 어떻게 환상이야!” 헉슬리는 대답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은빛 섬광이 셰익스피어 교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번쩍, 하고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섬광이 지나간 자리에 반 밖에 남지 않은 시체가 넘어지듯 쓰러졌다. 그 형태가 익숙했다. 사실과 환상이 뒤엉켜 칼로 자르듯 나눌 수가 없다.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었다.
“글쟁이, 지금이라도 도망가라고 하면 도망칠 거냐.”
“저 뱀의 숨통이 끊어지는 꼴을 보기 전까진 못 가. 아니, 안 가!”
“이제부터는 네 목숨 네가 간수해야 한다. 못 구해줘.”
“상관 없어.” 은빛 뱀은 혀를 날름 거리면서 우리 쪽을 보았다. 저 집채만한 몸뚱이의 발악에 휘말리면 살아남기가 힘들 터였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 나는 계단을 거슬러 올라 앉았다. 만약 헉슬리가 사냥에 실패해 셰익스피어 교수의 전철을 밟게 된다면…. 그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뱀은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똬리를 틀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내려다보는 그 꼬락서니가 헉슬리는 상당히 거슬리는 듯했다. 잔뜩 심술이 난 얼굴로 걸어가더니, 허공에서 시미터를 꺼내 들고는 예고도 없이 은빛 뱀의 뱃가죽에 찔러 넣었다. 나도 그렇지만 은빛 뱀 역시 그녀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귀 떨어질 듯한 괴성을 지르더니, 아가리를 벌리고 거칠게 몸부림쳤다.
헉슬리는 힘에서 밀리지 않고 오히려 힘으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한 자루 시미터로 은빛 뱀을 능란하게 가지고 놀았다. 반 토막도 안 되는 몸에서 어찌 저런 힘이 솟아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은빛 뱀은 덩칫값 못하고 자꾸만 나가떨어졌다. 그때마다 뱀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구슬피 울었다. 너무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게 사냥당하는 게 억울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은빛 뱀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쉭쉭거렸다. 이빨은 톱날처럼 생겨 제대로 물리면 끝장이었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의 죽음도 아마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뱀의 공격은 상당히 직선적이었고, 따라서 단순했다. 상체를 뒤로 당겼다가, 쏘아지듯 달려들기를 반복했다. 주둥이가 맨땅을 때릴 때, 헉슬리는 집요하게 목을 노렸다. 뱀의 모가지는 아까부터 피투성이였다.
멀찌감치 서서 사냥을 지켜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은빛 뱀과 눈이 맞았다. 상체를 뒤로 당긴 채 뱀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망쳐!”
헉슬리의 외침보다 먼저 은빛 뱀이 달려들었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지금껏 헉슬리가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던 속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어디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못 박힌 듯 서서 은빛 뱀을 마주하였다. 번뜩이는 황금색 눈동자에서 나는 뱀의 분노를 읽었다. 어쩌면 뱀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분노일 지도 몰랐다.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끝나버리는 걸까.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길래 내가 그냥 돌아가고 했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대사에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내 앞에서 헉슬리는 왼발로 뱀의 아래턱을 밟고, 오른손에 쥔 시미터를 왼손으로 받쳐 든 채 뱀의 두 송곳니를 막고 서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그대로다. 이것도 연기처럼 사라질 환상일까?
헉슬리는 역도 하듯 단번에 힘을 주어 뱀의 위턱을 밀어 올렸다. 아가리는 열리기가 무섭게 닫혔으나 헉슬리는 이미 거기 없었다. 그녀는 위턱을 밀어 올리자마자 몸을 뒤로 빼고, 거의 동시에 내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리곤 글자 그대로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동굴의 반대편을 향해 날아가는 투포환 같은 꼴이었다.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면서도 내 온 신경은 뱀과 헉슬리에게로 쏠려있었다.
그녀는 나를 집어던지자마자 오른발로 뱀의 주둥이를 밟았다. 빈 깡통을 납작하게 만들기라도 하려는 듯 아주 맹렬한 짓밟기였다. 겉보기에는 개미가 하마의 주둥이를 밟고 있는 격이다. 그런 상황이 불쾌한지 은빛 뱀은 비늘이 다 떨어지도록 세차게 몸부림 쳤다. 그러나 오른발이 주둥이를 뚫고 지표면 깊이 박혀버리기라도 한 듯 헉슬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네 앞에 있는데 어딜 보는 거냐. 다시는 한눈팔지 못하도록 아주 한쪽 눈을 파버려 주마!!” 그렇게 고함치면서, 그녀는 시미터를 들어 그 끝으로 뱀의 눈깔을 겨냥했다. 헉슬리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여자였다. 시미터는 부드럽게 눈깔을 찢었고, 검고 끈적한 액체가 그 틈새로 쏟아져 흘렀다. 그녀는 칼을 크게 휘저어 틈새를 벌렸다. 애꾸가 된 뱀은 몸통을 뒤틀며 대가리를 사방으로 휘저었다.
필사의 발악에는 그녀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반동으로 헉슬리는 높이 치솟았다. 뱀은 아가리를 벌리고 그녀를 향해 몸을 일으켰다. 허공에서 헉슬리는 갈 곳이 없었다. 칼부림으로 저항하였지만, 뱀은 칼부림 채 헉슬리를 삼켰다. 주둥이에서 터져 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뱀은 외눈깔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 의도가 분명해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입이 얼어 말은 나오지 않았다. 도망칠 수도 있을 테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마치 주마등처럼 지금까지의 일들이 떠올랐다. 서로 입을 닫아 사방은 고요했다. 폭력적인 적막 속에서 나는 다가오는 운명을 체감했다.
그때, 은빛 뱀의 모가지에서 돌연히 은빛 가시가 돋아났다. 그 가시의 모습이 내겐 익숙했다. 헉슬리의 시미터였다. 시미터는 크게 돌아 뱀의 모가지에 아가미를 내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아가미가 번거로웠는지 뱀은 물가로 나온 미꾸라지처럼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모가지를 바닥에 긁어대었다. 아가미가 벌어지며 피는 더 격렬하게 쏟아졌다. 피 웅덩이 위에서 뱀은 더이상 은빛이 아니었다. 닫힌 공간의 촛불처럼 움직임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두 손으로 아가미를 벌리며 헉슬리는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모습이 마치 포악한 맹수 같아 나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시미터를 옷자락으로 닦으며 내게 돌아왔다. 피로 피를 닦아 피는 닦이지 않았다.
VII.
사원의 밖으로 나오자 안개는 온데간데없고, 선선한 바람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자 안개 걷힌 하늘 가득 별빛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조금 전까지의 것들이 다 꿈속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모든 순간이 현실적이었음에도 그 규모가 너무 커 외려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헉슬리의 뒷모습이 현실을 증명했다. 얼른 샤워하고 싶다며 그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발걸음을 서두르는 그녀의 들뜬 목소리 속에 현실은 부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도망치라고 했을 때 도망갔어야 했던 게 아닐까. 나는 못 박힌 듯 서서 고민했다. 늘 그렇듯 고민은 부질없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마을로 돌아갔다.
이것이 알프레아 헉슬리, 손님 사냥꾼과 내가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