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elaide Shakespeare
[ There is no escape from the GuestHunter ]
End of escapade.
멕시코시티 체재 마지막 날, 나는 바스콘셀로스 도서관에 틀어박혀 자료수집에 몰두했다. 식도락 관광을 포기해야 했지만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트럭 안에서 사내와 나누었던 대화, 사원 아래서 보았던 셰익스피어 교수의 모습, 그리고 헉슬리가 흘리듯 내뱉은 한 마디까지.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기에 더더욱 자료수집에 전념할 수 있었다.
가방을 의자에 걸어놓고 서가 속을 걸었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몰라 닥치는 대로 책을 뽑아 들었다. 필요한 자료 대부분은 정갈한 스페인어로 인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개중 몇 권은 멕시코 토착어와 알 수 없는 그림 문자로 몇 페이지를 낭비하기도 했다. 내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구글 번역도 그림 문자는 지원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날 도서관에는 멕시코 국립대학의 언어학 교수가 와 있었다.
“그분 이름이 뭔데요?”
“안토니오 루페즈라고, 그분이 토착어 분야에서는 제일 유명해요.” 모여있던 사서 중 한 분이 내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루페즈 교수가 어디에 박혀있는지는 사서들도 알지 못했다.
만남은 우연했다. 도서관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루페즈 교수가 내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그는 며칠 전의 세미나에서 나를 보았다고 했다. 우리는 점심을 같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림 문자와 토착어에 대한 루페즈 교수의 설명은 어렵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에 우리는 이메일을 교환했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자료에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 책상 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자료가 쌓여갔지만, 그 안에는 명쾌한 결론 없이 파편뿐이었다. 그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의미 있는 실마리로 만드는 건 오롯이 내 몫이었다.
헤이즐넛 한 잔으로 저녁을 때우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시티 애드버타이저>와 <아스텍 전쟁사> 사이에 무언가 연결고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때로는 진득하게 고민하는 것보다 번뜩이는 영감의 뒤를 쫓는 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헤이즐넛을 단번에 들이켜고 기록 보존실로 돌아갔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두 자료는 <중남미 언어학> 논문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렇게 계속 읽어가다 보니 점차 자료 간의 연관성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자료가 내 기억과 얽혀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것이 오후 7시 반, 그러니까 폐관 직전이었다. 나는 친절한 사서 분들에게 쫓겨나다시피 도서관을 나왔다. 호텔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근처에 알라메다 공원이 있어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늦은 시간에도 공원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좋았다. 나는 벤치에 앉아 가로등 불빛에 메모를 살폈다. 도서관에서 쫓겨나기 직전에 급하게 휘갈긴 탓에 메모는 난잡했다. 지렁이 글자를 눈으로 좇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사원의 지하에는 은빛 뱀이 있고, 뱀에게 처녀를 바쳐야 농사가 잘된다고 메스티소 사내는 말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멕시코 내 소수민족의 관습에 대한 분석>이는 논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겨울이 끝날 때쯤에 원주민들은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죽여 신에게 바쳤다. 그래야 신이 비를 불러 땅을 비옥하게 해준다고 그들은 믿었다.
이러한 관습과 믿음은 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의 군대가 유카탄반도에 상륙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는 협박과 회유만으로 아나우악 땅 위의 온갖 부족을 굴복시켰다. 원주민의 군대는 코르테스 휘하에서 결속하였고, 아스텍의 대도시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하기 위한 진군에 장애물은 없어 보였다. 제국의 황제 모테쿠소마 2세는 정복자의 발길을 돌리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황제는 치욕을 무릅쓰고 정복자를 환영했다. 제국 제일의 도시는 그렇게 유혈 한번 없이 정복자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아스텍 전쟁사>에는 ‘슬픔의 밤’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기술되어있었다. 아스텍의 가장 성대한 종교적 축제 톡스카틀(Toxcatl)의 둘째 날, 코르테스의 부관 페드로 데 알바라도는 휘하의 치안병들을 단단히 무장시켰다. 휘하의 원주민들 사이에서 테노치티틀란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축제는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알바라도의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밤이 되어 축제가 절정에 달했을 때, 알바라도는 치안병을 움직였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며 축제를 유린했다. 사원 아래에서 보았던 축제와 살육전의 환상은 아마 이 시기의 풍경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에스파냐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로 수많은 선교사가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그중 스페인 선교사들이 예수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은빛 뱀을 없앴다고 사내는 말했었다. 쿠바 총독부에서 간행한 <복음 전파의 노력>이라는 소책자에 따르면, 선교사들의 퇴마 의식은 나흘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의식 이후로 수백 년간 뱀은 나타나지 않았고, 인신 공양도 없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은빛 뱀이 다시 출몰한 것은 20세기 후반이었다. <멕시코시티 애드버타이저>가 당시의 상황을 1면에 실었다. 틀락스칼라의 고산지대에 거대한 은빛 뱀이 나타나 등산객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인물이 나타나 하룻밤 만에 그 뱀을 사냥했다고 한다. 신문 발행일을 확인해보니 음력 15일 언저리였다. 어제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던 게 우연은 아닌 듯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늘 밤 아니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헉슬리는 말했었다. 그 사실이 내게 새로운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고마워. 내 복수를 대신해줘서.” 사냥이 끝나고 펍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헉슬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하지만 그녀는 피식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칭찬에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후, 마을에 도착할 때쯤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알 수 없는 일이지, 뭐.”
헉슬리의 말을 나는 ‘내 알 바 아니다’ 정도로 해석했다. 헌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게 아닌 듯싶다. 나는 헉슬리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문제는 지금도 그녀의 의도를 확실히 모르겠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순전히 내 상상에 근거한 가설에 불과하다.
<멕시코시티 애드버타이저>에 따르면 20세기 후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나타나 은빛 뱀을 사냥했다. 헉슬리도 은빛 뱀을 사냥했으니, 최소한 은빛 뱀은 둘 이상이라는 의미가 된다. 어쩌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만에 하나 셰익스피어 교수가 은빛 뱀에게 잡아먹혔다고 해도, 어떤 녀석이 잡아먹었는지 알 수 없다.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해도 그걸 분간해줄 사람들은 이미 죽었거나 미쳐버렸으니.
아니, 나와 헉슬리가 그 뱀을 보았다. 분명 은빛 섬광이 셰익스피어 교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헉슬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알았을 것이다. 환상 끝에 나타난 은빛 뱀이, 환상 속에서 교수를 죽이던 녀석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은 곧 그런 뜻이었던 게 아닐까.
물론 이것으로 의문이 말끔하게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은빛 뱀은 헉슬리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산 채로 잡아먹은 까닭에 모가지 주변으로 아가미가 생기는 진기한 경험을 당했지만, 그러한 사실과 별개로 야니 모의 주장은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뱀은 먹이를 베어 물지 않는다. 단번에 삼켜버릴 뿐.
그러나 셰익스피어 교수는 단번에 삼켜지지 않았다. 절반이 남고 나머지는 사라졌다. 옆구리에서 배꼽을 지나 다시 반대쪽 옆구리까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깔끔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마치 '은빛 뱀조차 베어버릴 만큼 예리하게 날을 세운 칼로 단번에 해치운' 듯이. 생각해보면 헉슬리는 '오늘 밤 아니면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이미 한 달을 기다렸다는 의미일까. 어쩌면 그 이상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 이상을 기다리던 와중에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를 만난 것이다. 그리곤 감도 잡히지 않는 어떠한 까닭으로 헉슬리는 그녀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내가 보았던 은빛 섬광은 휘둘러진 칼날의 모습이었을까. 발견된 몇 사람이 계속해서 중얼거리던 ‘Serpiente plateada’는 사실 은빛 악마였던 것이다. 은빛 칼날을 휘둘러 단번에 셰익스피어를 베어낸 악마.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구만. 잠을 못 자서 맛탱이가 가버렸나.” 나는 애써 메모해온 종이를 구겨버리고는, 근처 쓰레기통에 화풀이하듯 집어던졌다. 떠올린 가설은 뭐 하나 말이 되질 않았다. 셰익스피어 교수를 죽인 게 헉슬리라고? 그녀는 사원 가는 길을 몰라 내게 길잡이를 부탁할 정도였다. 셰익스피어 교수는 사원 아래서 죽었으니, 만약 헉슬리가 그랬다면 사원 가는 길을 모를 리 없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수많은 논문과 서적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무언가를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손에 그 감촉이 느껴졌는데, 이제 와 확인해보니 두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헉슬리가 여기까지 내다보고 ‘알 수 없는 일’이라 말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나는 셰익스피어 교수의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이 모든 기괴한 경험을 통해 전혀 다른 세상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 한 가지. 괴물 같은 뱀과 그걸 사냥하는 존재가 별달리 감춰지지도 않고 딱히 숨을 생각도 없이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시선을 조금만 틀어도 바로 보이는 세상을 왜 여태껏 알지 못했을까. 마치 커다란 장막에 의해 가려져 있던 것이 우연히 드러난 듯했다. 그리고 이 넓은 공원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더이상 여기 앉아있어봐야 별 소용이 없다. 나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로 향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있는데 그 와중에 작은 스탠드바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울적할 땐 술이 최고라….” 셰익스피어 교수의 명언을 읊조리자, 문득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차도를 쌩쌩 지나는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소음도, 옥신각신 떠들어대는 거리의 멍청이들도, 후텁지근하게 불어오는 바람 마저도 내게 술을 부추겼다. 지갑을 확인하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이 모든 것을 추억하며 기네스를 주문했다.
눈물 섞인 기네스는 맛없었다. 그래도 나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셰익스피어 교수가 가장 좋아하던 맥주였으니까. 내게 이 술을 알려준 것도 그녀였다. 슬픔 속에서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술을 마셨다. 취기가 어디쯤 와있는지 살필 겨를도 없이 술잔이 나오는 대로 무작정 들이켰다. 도대체 어느순간 고꾸라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나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