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Hamersley
[ We cast anchor lowered it into the water off a small island. ]
Null.
“인류의 존망이 이미 결정되어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아?”
- 히이라기 리노카
I.
무성히 자라난 수풀을 걷어내자, 심연을 머금은 동굴의 아가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칠흑 같은 어둠에 나는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두려움을 몰아내고자 랜턴을 켜보았지만 불빛은 입구 언저리밖에 비추지 못했다. 깊고 깊은 어둠은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마침내 동굴의 입구를 찾았는데 고작 어둠이 무서워서 머뭇거리는 꼴이라니. 나는 애써 웃어보았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동굴 안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청바지가 진흙에 더럽혀지는 것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대관절 저 안에 무엇이 있기에. 스스로에게 질문했으나 답은 내게 없었다. 셰익스피어 교수가 몇 가지 자료를 남겨놓았지만, 그거론 무엇 하나 유추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답을 찾고자 한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나는 눈을 들어 심연 깊은 곳에 시선을 두었다. 답은 거기 있었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고 했던가….”
젊었을 때 읽었던 니체의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정확히 무슨 뜻이었는지는 이제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도 ‘근묵자흑近墨者黑’ 같은 뉘앙스였으리라. 그렇다면 저 안에서 내가 답을 찾는 동안, 심연도 내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할까. 이따위 형이상학에 대해서도 나는 답할 수 없었다. 답할 수 없었기에 나는 쉬이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동굴을 찾아 헤매던 지난 며칠간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지옥을 가로질러왔다. 분명 이곳은 지옥이었다. 바깥세상에선 보고된 적 없는 짐승들이 섬 안에 득시글거렸다. 하나같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상해본 적조차 없는 형태. 그것들의 신체구조는 적어도 내 상식선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과연 저 안에도 짐승들은 있을까. 아마도 이것이 내 발걸음을 멈춰세우는 주된 질문일 것이었다. 그 흉측하고 섬뜩한 것들과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고고학자의 본능 같은 게 내 이성을 설득했다. 저 심연 속에 가라앉은 비밀이 궁금하지 않으냐고. 나는 담배 한 까치를 물며 크게 한숨 쉬었다. 본능이 나를 사지로 이끄는 게 아니기를 비는 수밖에.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가, 나는 물었던 담배를 도로 담뱃갑에 넣었다. 물과 식량은 충분하지만, 담배는 아니었다. 지금 한 대 피운다면 남는 것은 돛대뿐이다. 아낄 수 있을 때 최대한 아껴두는 편이 좋으리라. 지옥 같은 이 땅에서 담배마저 없다면 나는 무너져내리고 말 터였다.
단테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 역시 지옥을 헤쳐 천국에 도달할 수 있기를. 어둠 속으로 들어가며 나는 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랜턴의 불빛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II.
“고생하셨어요, 선생님.”
“아니에요. 승연이가 워낙 잘 따라와 줘서.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벌써 해가 저물고 있다. 불긋하게 떨어지는 석양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침 열 시부터 오후 일곱 시까지. 점심 먹는 시간을 빼면 주말마다 여덟 시간씩 일하고 있는 셈이다. 고작 이틀 일했을 뿐인데도 삭신이 다 쑤신다. 도대체 직장인들은 어떻게 주 5일을 — 그것도 매일같이 야근하면서 — 일할 수 있는 걸까. 모니터 앞에 하루 종일 앉아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정신이 다 아찔해진다. 그런 면에서는 내 인생에도 어느 정도 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겠다.
석사 학위 따위 있어봤자 사는 데 도움 안 된다고 늘 투덜거렸는데, 과외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영국 대학 석사 학위의 파급력은 놀라울 정도다. 학부모들은 내가 영국에서 10년 이상 살았다는 것보다, 영국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쪽에 더 관심을 갖는다. 덕분에 과외비가 비싸도 아무 말 않으니 나한테는 오히려 잘된 일이겠지만.
다만, 주말 이틀이 글 쓸 시간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은 조금 애석하다. 평일 내내 글을 쓰는데도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원래 과외는 먹고 사는 걱정을 해결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는데, 이제는 빵꾸난 통장까지 메워야 하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냥 멕시코시티에 눌러앉아 버릴 걸 그랬나. 나는 속으로 자조했다.
이렇게 과외 수를 늘린 까닭을, 나는 영국 고고학회의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실상은 전부 내 잘못이었다. 멕시코시티에서 비행기를 놓친 까닭에 나는 내 돈으로 인천행 비행기표를 사야 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가장 저렴한 티켓도 내 통장에는 치명타였다. 영국 고고학회 측에 이러한 사정을 설명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냉정했다.
“아르덴 베이커 씨의 실수로 인해 발생한 비용이라서 저희 측에서 어떻게 해드릴 수가 없을 거 같습니다. 저희도 국가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는 거라서요.” 말투는 대단히 정중했으나, 듣는 입장에서는 니 잘못으로 발생한 비용을 왜 우리한테 청구하고 지랄이냐고 따지는 듯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서 나는 얼버무리듯 전화를 끊었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치는데 마땅히 돈 들어올 곳이 없었다. 멕시코시티로 떠나기 전에 완성한 세 편의 단편은 모조리 퇴짜를 맞았고, 논문이나 전공 서적을 번역하는 일도 감감무소식이다. 새로운 단편 작업에 착수해보았지만 도입부조차 써내지 못했다. 마음이 다급해서 문장은 지리멸렬했다. 결국 일요일 하루만 하던 영어 과외를 토요일까지 확대했다. 토익이나 수능 외에도 직장인을 위한 그룹 회화반도 하나 만들었다.
돈벌이가 안정적이라 삶은 전보다 풍족해졌다. 원하는 책을 살 수도, 가끔은 치킨을 사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활을 견딜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물론 노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학생만큼이나 희귀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성이 남들보다 훨씬 심한 편이었다. 놀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아무래도 팔자에 베짱이가 있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고개를 돌려 어깨너머를 살폈다. 아까부터 자꾸만 누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해 떨어진 어두운 골목길에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으로 다 밝혀지지 않는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 사실 누가 내 뒤를 밟겠느냐마는, 세상이 흉흉하니 별생각이 다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공장 단지로 접어들자 바람결에 아세톤 냄새가 진동했다. 오래간만에 맡아본 그 냄새가 석사 시절 연구실에서의 고된 나날을 기억나게 할 뻔했다.
추억 비스무리한 것이 떠오르기도 전에 등 뒤에서 거한 폭발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없는 애도 떨어질 듯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뒤를 돌아보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골목에서 새카만 연기가 구름처럼 흘러나왔다. 내가 보고 있는 동안에도 골목에서는 몇 번의 폭발과 금속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경우에는 경찰을 불러야 하나? 역시 소방차를 부르는 게 더 낫겠지?’ 나는 둘 다 부르면 된다는 간단한 해답을 생각해낼 줄 모르는 멍청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백팩과 주머니 그 어디에도 스마트폰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과외 학생네 집에 놓고 온 모양이다.
자욱한 연기를 뚫고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어깨에 내려앉은 잿가루를 털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나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사내 쪽이었다.
“혹시 아르덴 베이커 씨 맞으십니까?”
“……어떻게?” 사내는 새카만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그건 둘째치고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내 생각을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사내는 품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었다. 새하얀 바탕에 개러몬드 서체로 그의 이름과 이메일 주소가, 다른 한쪽에는 법률 사무소의 로고가 금박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주 고급스러운 명함이다. 심지어 종이 재질조차 끝내줬다.
“데릭&블레이크 법률 사무소의 제임스 데릭입니다. 애들레이드 레오니 셰익스피어의 유언 집행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시고?”
“우연히 만났다고 해둡시다.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고 여긴 위험하니까. 가면서 이야기할까요?”
“하지만….” 내가 골목 쪽을 돌아보자 사내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소방차를 불렀고, 여기 있어봤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 변호사가 하는 말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구구절절 옳은 소리처럼 들렸다. 과외 시장에서 영국 대학 석사 학위가 그런 것처럼, 사내의 변호사 직함에도 사람 홀리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속으로는 골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정작 몸뚱이는 사내와 함께 걷고 있었으니.
제임스 데릭 변호사는 내게 셰익스피어 교수의 유언과 관련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했다. 런던에서 처리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까딱 잘못하여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굳이 찾아온 것이라 덧붙여 말했다. 그는 품에서 녹음기를 꺼내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확인차 질문드리는 건데, 아르덴 베이커 본인 맞으십니까?”
“예, 제가 베이커입니다.”
“본명은 아니시고요.”
“필명인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 제가 유능하기에 괜찮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 그러나 허풍선이는 아닌 듯했다. 유언에 쓰인 이름이 가명일 경우 문제가 더럽게 복잡해진다고, 나중에 누나가 전화로 알려주었다. 유언장에 쓰인 가명이 나란 사람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내는 몇 가지 질문을 덧붙였다.
기나긴 신분 확인이 끝나고 나서야 제임스 데릭 변호사는 유언장을 공개하였다. 나는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낀 채로 두툼한 종이뭉치를 읽어내려갔다. 반가운 이름과 낯선 이름이 각자 애들린 셰익스피어로부터 무언가를 받게 되었다. 내 이름은 가장 마지막이었다.
셰익스피어 교수는 나에게 런던 소재의 자택과 미완성된 연구논문, 그리고 수백만 파운드 상당의 은행 계좌를 물려주었다. 사실상 그녀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가족이나 친척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돈을 받아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다. 둘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걸 내가 받아도 괜찮은 걸까. 아무 생각 없이 덜컥 받아버리기에는 너무나도 큰 금액이었다. 고민하는 내게 제임스 데릭 변호사가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이 유언은 아르덴 베이커 본인이 (그러니까 대리인은 안된다는 소립니다) 런던 소재의 자택에 거주하는 것으로 그 효력을 온전히 합니다.”
“그게 어느 나라 말이죠?”
“돈 받고 싶으면 런던으로 와서 살아라. 뭐, 그런 뜻입니다.”
“런던으로, 흠, 가볍게 대답할만한 사안은 아닌 거 같네요. 조금 생각해보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아까 드렸던 명함에 제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가 있습니다. 그쪽으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나는 제임스 데릭 변호사가 돌아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방에 들어갔다. 씻어야 했지만, 지친다. 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욕심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먹고살 걱정 없이 소설에만 몰두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름철 휴가 떠나듯 가뿐하게 결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경기도 하원시에서 영국 런던까지는 멀어도 너무 멀다. 가려거든 이곳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떠나야 했다. 과외는 물론이고 자취방까지도.
고민에 고민이 이어져 고민은 부질없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하자. 나는 그렇게 결정했다.
III.
쉬어갈 겸 바닥에 주저앉아 깡생수를 들이켰다. 동굴에 들어온 지도 벌써 일주일 정도가 지났지만, 아직은 먹고 마시는 데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동굴은 깊고 넓어서 좀처럼 끝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며칠 안에 끝날 탐험이 아니라서, 나는 물 한 병 칼로리바 한 개가 아쉬웠다.
한 가지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돌아갈 때를 위해 식량을 아껴둘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이 석회동굴은 복잡하기가 개미굴 같아서, 한 번 들어오면 나오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그래서 나는 애당초 빠져나갈 생각을 버렸다. 동굴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는 것으로 탐험은 끝이었다. 거기가 내 묏자리였고 처음부터 그럴 결심이었다. 나는 생수병을 가방에 넣고서 탐험을 이어갔다.
“어쩐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거 같은데.”
하지만 어디를 보아도 비슷한 풍경이다. 단지 랜턴을 이리저리 비추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헨젤과 그레텔의 선례를 따르기에는 식량이 넉넉치 않다. 게다가 그 뒤를 따라 짐승이 몰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밑으로 움푹 파인 길 아래로 시체 한 구가 있었다. 석순에 기대어 누운 듯한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인다. 마침내 죽음이 그에게 안식을 가져다준 걸까. 나는 가까이 다가가 시체를 살펴보았다. 군데군데 물어뜯긴 흔적이 있는 거로 보아 짐승의 습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뭐 쓸만한 게 없나 싶어 시체의 소지품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가방은 텅 비어있었고, 물병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유일한 소득이라곤 시체의 손에 쥐어져 있던 일기장 한 권뿐이었다.
상당히 오래된 듯한 가죽 수첩이다. 적어도 30년 전의 일기였다. 나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며 내용을 훑었다. 그리고 일기장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서, 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1988년 7월 21일
이 동굴은 무언가 잘못되었다. 바깥세상에서 통용되는 대다수의 논리와 법칙이 여기서는 무용지물이다. 오늘, 우리 탐사대의 절반이 사라졌다. 사라진 절반의 대원 덕분에 나머지 절반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이런 나날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걸까. 계속 환청이 들린다. 호수의 요정. 우린 거기에 당도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오, 하느님 맙소사. 우리를 여기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에게 이곳을 벗어날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젠장, 빌어먹을. 제발 우릴 도와달라고.
절반이 사라져 나머지 절반이 배불리 먹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면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사실 좀 불쾌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별다른 의미 없는 문장일지 모른다. 사라진 대원들의 몫까지 먹을 수 있었다는, 그런 의미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쪽으로 미화해보려 해도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를 않았다. 그 단락이 나로 하여금 자꾸만 식인 행위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군데군데 물어뜯긴 흔적이 자꾸만 사람의 잇자국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람의 잇자국일 리가 없다.
게다가 시체는 죽은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이게 옳은 표현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사실 꽤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30년 전의 탐사대원이 이렇게까지 신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까놓고 말해서 말이 안 되지.”
논리법칙이 무용지물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을까. 아니면 이 시체가 일기장의 주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일기장을 발견한 것은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무엇보다 일기는 앵커anchor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분명 호수의 요정을 만났고, 앵커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반응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가 틀린 걸까. 나는 그런 결과를 원치 않았다. 역시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밖에.
그런 생각으로 일어났는데, 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얼어붙었다. 위쪽에 무언가가 있다. 기척이 분명했다. 나는 올려다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