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Hamersley
[ We cast anchor lowered it into the water off a small island. ]
IV.
파자마가 식은땀으로 젖었고 침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나타난 시각은 오후 다섯 시. ‘터무니없을 정도로 굉장한 늦잠을 자버렸다!’라고 생각한 직후에야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런던 시간으로는 아침 아홉 시 정도. 약 기운에 취해 잠들었던 것치고는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다. 오래 누워있었던 탓에 몸 곳곳이 뻐근했지만, 기분은 날아가리만치 상쾌했다. 이마를 짚어보았지만 조금도 뜨겁지 않았다.
“겨우 열이 내려간 건가….”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상태는 좋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엉망진창이었다. 마중 나온 제임스 데릭 변호사가 ‘응급실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저 장거리 여행에서 오는 가벼운 몸살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이코노미 클래스에 열세 시간을 구겨진 채로 버텨내었는데,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나는 변호사로부터 서류 봉투와 열쇠 꾸러미를 챙겨 들고 택시에 올랐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나는 치솟는 고열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악몽에 시달렸다. 훼손된 시체와 흉측하게 생긴 짐승, 그리고 어두운 동굴을 헤매는 내 모습이 의미 없이 반복되었다. 이런 스스로의 처지가 너무 서러워서, 앓는 동안 나는 자주 울었다. 다행히 컨디션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고, 악몽을 꾸는 밤도 크게 줄어들었다.
응급실 가랄 때 갔으면 이 정도로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죽다 살아난 기분이다.
“이놈의 집구석은 뭐 이리 먹을 게 없냐.” 격한 배고픔에 나는 요깃거리라도 찾아볼 겸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동안 먹는 족족 게워낸 탓에 위장이 텅 비어있었다. 당장 뭐라도 쑤셔 넣지 않으면 배고파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애들리에드 셰익스피어의 부엌에는 식재료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두세 달 씩 유통기한이 지나있다. 그녀가 이 집을 떠난 것도 꽤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일단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비스킷에 홍차를 끓여 겨우 아사餓死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배가 좀 차니 그제야 집 꼬락서니가 눈에 들어온다. 소복히 쌓인 먼지는 양반이었다. 반쯤 열린 캐리어와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오만가지 잡동사니가 어지러이 널려있다. 난장판도 이 정도면 범죄 현장 수준이었다. 누가 보면 도둑이라도 들었다고 생각하리라.
이제 막 감기 기운이 떨어진 참이다. 괜히 무리해서 다시 앓아눕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청소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다. 나는 창문이란 창문은 전부 다 열어 환기를 시켰다. 맑은 바람이 묵은 땀내와 먼지를 휘몰아가는 동안 나는 청소기를 꺼내와 저택의 구석구석을 휩쓸고 다녔다. 그런데 한창 2층의 방을 청소하고 있는 도중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안 계세요?” 뒤이은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계단 내려가는 게 귀찮아서, 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현관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왕방울 안경이 어딘가 익숙하다. 급기야 주먹으로 문을 후려갈기기에 나는 적당히 인기척을 내었다.
“고만 두드려 남의 집 문짝 부술 일 있냐.” 그제야 그녀는 내 쪽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아직 있었네.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녀가 말했다.
“이제 일주일 지났는데 설마 벌써 갔겠어? 애당초 여기서 평생 살아야지 하고 온 건데. 근데 여긴 어쩐 일로?” 레미 헤이즐은 셰익스피어 교수의 제자였다. 그녀의 제자 중 내 또래라고는 헤이즐 한 사람뿐이었고, 그 때문인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왜 왔냐고? 셰익스피어 교수님이 보관하시던 자료와 미완성 논문을 넘겨주겠다면서. 그래서 받으러 왔지.”
“자료와 논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기억나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의 유언에 따라 내게 주어진 것 중에는 미완성된 연구자료와 논문도 있었다. 돈은 쓰고 집은 살겠지만 연구자료와 논문은 내게 쓸모가 없다. 그래서 레미 헤이즐을 통해 연구실인지 사무실인지로 싹 다 보내버리기로 했었다. 그게 오늘인 줄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서 그런데, 5분만 기다려봐.”
“시간 잴 거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시늉을 했다. 나는 행동을 서둘러야 했다.
청소가 거의 끝나 집안은 깔끔하다. 다만, 집 안에 있는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앓는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해 노숙자보다 꾀죄죄했고, 파자마에서는 땀 구린내가 고약했다. 아무리 친하다 해도 이런 꼴로 손님을 맞을 수야 없다. 나는 빨래 바구니에 파자마를 던져넣고 곧장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물론 씻는데 5분보다는 더 걸렸지만, 헤이즐은 거기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연구 자료 어디 있어?”
“서재에 있더라. 슬쩍 보니까 상자가 꽤 많던데, 도와줄까?”
“도와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미리 현관 쪽에 옮겨놨어야 하는 거 아니냐! 너 그 정도 센스도 없는 사람 아니었잖아.” 레미 헤이즐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타이밍에 급발진을 하곤 한다.
“야 씨 그럼 너 혼자 옮기던가.” 나는 짐짓 흥칫뿡 하며 팔짱을 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깝쳤네요. 제발 옮기는 거 도와주세요오오.”
셰익스피어 교수의 꼼꼼한 연구조사 덕분에 상자마다 종이로 가득했다. 게다가 꼴에 남자랍시고 한 번에 두 상자씩 들고 옮기려니 죽을 맛이었다. 체감 무게는 20kg짜리 쌀 포대를 한참 상회한다. 어머니는 여자 앞에서 만용을 부리는 건 우리 가문 특유의 기질이라고 하셨다. 그 기질이 나에게도 있는 걸 보면 나는 아빠 아들이 맞는 것 같다.
둘이서 쉬지 않고 열댓 번 움직이니 삼십 분이 채 안 되어 다 옮길 수 있었다. 상자가 하도 많아 그녀가 끌고 온 승합차 뒷좌석이 틈 하나 없이 가득 찼다. 볼일 다 봤으니 가보겠다는 헤이즐을 내가 붙잡았다.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나 부가티 아니면 안 마신다.“
“아 제발 좀!” 내 외마디 비명에 그녀는 낄낄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 나는 주전자를 비우고 새로 홍차를 끓여냈다. 차에 곁들일 만한 다과가 없어서, 먹다 남은 비스킷 몇 조각에 치즈를 얹어 접시에 내왔다. 치즈는 발효식품이니까 유통기한이 지나도 먹을 수 있으리라.
“근데 이거 와인 안주 아니야?” 헤이즐이 비스킷을 하나 집어 들며 물었다.
“있는 게 이것밖에 없더라고. 우유 없이 설탕 두 스푼이었던가?”
“기억하고 있네?”
“워낙 특이해야 말이지.” 내가 답했다. 설탕을 안 넣는 사람은 있어도 우유를 안 넣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 사람이 런던 토박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까닭에 할 말이 넘쳐났다. 즐거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셰익스피어 교수 이야기는 가급적 꺼내지 않으려 했다. 분명 우울해질 테니까. 헤이즐 역시 의도적으로 그쪽 주제를 피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다 우연히 그 사내의 이름이 나왔다. 나는 별생각 없이 꺼낸 한 마디였다.
“상자 되게 많던데 왜 혼자 왔냐. 해머즐리 씨라도 데려오지.”
“어, 뭐….”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표정에서 뜻 모를 두려움이 보였다. 그러나 왜 그녀가 두려워하는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같이 일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분이 셰익스피어 교수의 뒤를 잇는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한데 일이 좀 있었어. 티타임에 어울리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나저나 멕시코시티는 어땠어?” 레미 헤이즐은 말 돌리기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의도적인 주제 전환을 눈치 못 챌 만큼 둔감한 놈은 아니었고. 알렉스 해머즐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 그러나 헤이즐의 태도가 너무 완강했다. 궁금증을 참기가 힘들었지만, 말하기 싫다는 사람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후 우리의 티타임은 시시콜콜한 주제를 겉돌다가 애매하게 끝을 맺었다.
“주말에 딱히 뭐 없지?” 운전석 창문이 열리더니 대뜸 헤이즐이 물었다.
“아마 없을 거 같은데, 왜?” 친구도 없는 내가 주말에 뭐가 있을 리가 없다.
“교회 갔다가 다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너도 여기 자리 잡으려면 로컬 친구들을 좀 만들어야 할 거 아냐. 내가 차 끌고 올 테니까.”
“예수님 안 믿어도 갈 수 있는 거냐, 거기.”
“나도 안 믿어. 적당히 믿는 척하는 거지. 하여튼 갈 거야 말 거야.”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볼게.” 내 대답에 그녀는 ‘무슨 초딩이냐’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헤이즐은 초딩을 무시하는 게 틀림없다. 아니면 한국 초딩에 비해 영국 초딩은 사는 게 좀 널럴하다거나.
레미 헤이즐을 떠나보내고 나는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다락방에 콘센트가 없어서 나는 청소기 대신 물걸레를 들고 투입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바닥에 깔린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다시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매캐한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작전상 후퇴했다가 30분 뒤에 돌아왔다.
그 상자를 발견한 게 바로 이때쯤이었다. 상자는 잡동사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꼼꼼히 걸레질하지 않았다면 영영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셰익스피어 교수가 자료를 정리하는 데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상자였다. 서재에 있던 상자들에 비해 훨씬 가벼웠는데, 앞쪽에 ‘Gate Island’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호기심에 열어보았지만 별거 없었다. 수기로 작성한 메모와 나무 조각상이 전부였다.
메모는 주로 Gate Island의 동굴과 호수의 요정에 대한 것이었다. 적혀있는 내용이 워낙 단편적이었던지라 나는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 대신 조각상 쪽으로 관심을 돌려봤는데, 참으로 기묘한 생김새였다. 뭘 조각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조각은 아니라는 점일까. 불경한 상상력 속에서 탄생한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악의, 사악한 본능이 조각상 면면에 도사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메모를 살펴보았지만 이 조각상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리저리 살펴보던 와중 문득 열병의 나날 악몽 속에서 보았던 짐승이 이것과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어쩐지 조각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꿈틀거리는 바퀴벌레를 집어 든 마냥 소름 끼쳐서, 나는 얼른 상자에 돌려 넣고 뚜껑을 닫아버렸다. 그게 실제로 기어 나올 리가 없는데도 나는 상자 위로 묵직한 잡동사니 바구니를 올려놓고 나서야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다시금 물걸레를 휘적거리며 청소를 이어갔지만, 나무 조각상의 기묘한 촉감은 도무지 잊혀지질 않는다.
V.
수직굴의 위쪽으로 기척이 명확했다. 몇 마리인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저 위에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 주변에 무기로 쓸만한 날붙이가 없어서, 나는 시체의 다리뼈를 집어 들었다. 살점이 붙어있어 만지는 기분이 끔찍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시선을 위에 둔 채 여러 경우를 상상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해도 결국에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이쪽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기를. 나는 간절히 빌었지만 기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짐승 한 마리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생김새가 아주 특이했다. 어떻게 보면 다리 여섯 달린 거미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다리 여덟 달린 개미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덩치는 도베르만 저리 가라 할 정도니 이것 참 난감하게 되었다. 힘으로 때려눕히는 건 어림도 없고, 도망친다 해도 금방 따라잡힐 터였다. 툭 까놓고 말해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다.
하나 다행인 것은 아직 저 짐승이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감광 능력이 전혀 없는지, 랜턴을 환하게 켜뒀는데도 더듬이 같은 기관을 바삐 놀리며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이 경우 먹잇감은 바로 나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아주 끔찍했다. 생존본능이 급히 내 입을 틀어막았지만, 새어 나오는 신음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저 위에서 내 앞으로 뚝 떨어지는 게 한순간이었다. 달려드는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반사적으로 뼈다귀를 휘둘렀으나 애꿎은 허공을 때릴 뿐이었다. 날래기가 비호같았다. 그만한 덩치에 이 정도로 민첩한 건 반칙이다. 다만 이 동굴에 심판은 없었다. 나는 마구잡이로 뼈다귀를 휘두르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러나 짐승은 동굴 벽과 천장을 타고 달리며 나를 위협했다.
짐승 쪽에 온 신경을 쏟으며 뒷걸음질 치다 보니 돌부리를 피하지 못했다. 엉덩방아를 찧은 직후 아차 싶었다. 잽싸게 일어나려 했지만 짐승이 내 위에 올라탄 후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에 숨이 턱 막혔다. 뼈다귀로 짐승의 대가리를 후려쳤지만, 꿈적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뼈다귀가 반으로 똑 부러져버릴 뿐이었다.
내 위에서, 짐승은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포효했다. 아래턱이 세 갈래로 쪼개지며 불쾌한 점액을 쏟아내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송곳 같은 것이 배를 꿰뚫었다.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고통은 쏟아져 내리는 산사태처럼 순식간에 온몸을 휩쓸었다. 다급히 더듬어보니 역시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든 것이 있었다. 그 틈새로 피는 순식간에 쏟아져 나갔다. 이물질을 뽑아내려 했으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벌써 팔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VI.
열병의 나날을 뒤로한 채 나는 빠르게 런던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이미 몇 년 살아본 곳이라, 나의 런던살이는 걸음마라기보다는 차라리 재활 치료에 가까웠다. 익숙했던 모든 것을 다시 습득해나가는 일은 고되고도 즐겁다.
매주 주말이면 레미 헤이즐이 끌고 온 구식 복스홀 자동차를 타고 런던 밖으로 나간다. 소박한 성공회 교회와 유쾌하고 친절한 사람들.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다 같이 근처의 펍으로 옮겨 점심을 먹는다. 밥은 부차적이고 메인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다. 그 목가적인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최근의 나는 교회 나가는 맛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평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는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다. 모든 나의 생활이 집 안에서 이루어진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나가는 게 귀찮을 뿐이다. 돈 벌러 나갈 필요가 없어지면 사람은 누구나 히키코모리가 되지 않을까? 문화생활이랄지 사교 생활 같은 건 주에 한 번으로 족하다.
그렇게 집에 박혀 살던 어느 날의 오후. “계십니까!” 밖에서 들려온 사내의 목소리는 두꺼웠고, 단어의 사이사이에 중동 억양이 물씬 풍겼다.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나는 카즈오 이시구로를 덮고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까무잡잡한 피부에 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가 내게 종이봉투를 들이밀었다.
“양꼬치에 갈릭난, 허머스 추가 맞으시죠. 배달비 포함해서 13파운드 75펜스입니다.”
“나머지는 팁이에요.” 나는 15파운드를 건네고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야 당연히 한국에 비하면 황무지에 다름없지만, 영국에도 음식 배달해주는 식당이 소소하게나마 존재한다. 종류도 중국 음식이나 태국 음식, 인도 음식 등 생각보다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렇지만 역시 시장에 다녀와야겠다. 허머스 듬뿍 찍은 갈릭난을 우물우물거리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내게 있어서 여행과 생활을 나누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는 ‘장보기’이다. 나가서 사 먹기만 하면 여행이요 장을 보고 요리를 해서 먹고사는 것이 생활이다. 그러니 런던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언제까지고 배달 음식만 주구장창 시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양꼬치에 갈릭난도 자주 먹으면 질린다는 말을 이렇게 길게 쓸 수 있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날씨를 확인해보니 오후에 비 소식이 있었다. 이 계절에 런던은 하루걸러 하루 비가 내리는 동네이지만, 보통은 안개처럼 부슬부슬 내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기예보의 말에 따르면 오늘 빗줄기는 장난 아닐듯싶었다. 가려거든 오전 중에 잽싸게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지갑과 스마트폰, 접이식 장바구니만 챙겨 나왔다.
그날 런던은 드물게도 날이 좋았다. 이러고서 손바닥 뒤집듯 구름 끼고 비 내리는 게 런던 날씨기는 하지만, 당장은 그럴 낌새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이 맑았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쬐고 있자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평일 대낮의 한산한 거리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유유자적 걸었다.
그러다 어느 가게 앞에서 멈춰서게 되었다. 원래 거기는 독일 아저씨의 수제 맥줏집이 있던 곳이었다. 무더운 여름밤에 특히 자주 찾았다. 집에서 가깝고 가격도 저렴한 데다가, 무엇보다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주었다. 그 점 덕분에 시원찮은 맥주 맛도 그냥저냥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런데 5년 만에 다시 찾은 맥줏집은 더이상 맥줏집이 아니었다. 피렌체식 화덕을 두 개나 장착한 전문적인 피자 가게였고, 주인장도 독일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이러한 변화가 런던에 불어닥친 젠트리피케이션의 바람에 편승한 것인지, 아니면 수제 맥주의 시원찮은 맛 때문인지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추억의 가게가 없어져 조금은 서운하달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려다가, 나는 그것을 보았다. 우연히 보아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차도 한가운데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실제로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을 만큼 투명했기 때문이다. 너무 투명하여 결코 볼 수 없다. 다만 그것의 주변으로 중력 렌즈처럼 세상이 왜곡되어서, 나는 간접적으로나마 그것이 거기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날이 좋으니 신기루가 생기나?” 내 머리로 쥐어 짜낼 수 있는 그나마 가장 납득 가능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신기루라고 하기에는 허공에 상이 맺혀있지 않았고, 날이 좋기는 하지만 아스팔트 절절 끓을 정도는 아니다.
그것이 사라지거나 하질 않으니 나도 섣불리 움직이기가 뭣했다. 그렇게 몇 분을 서로 꼼짝 않고 대치했다. “어지간히 끈질기네, 진짜.” 먼저 상황을 깨고 나온 것은 상대 쪽이었다. 그녀는 장막을 가르고 나오듯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뻘건 가죽 재킷에 새까만 데님 바지,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어우러져 꼭 롹커 같다.
처음에 나는 이것이 사원 아래 동굴에서와 비슷한 종류의 환상이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는 걸 곧 알아차렸지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잘 되었네요.” 그녀는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내게 다가왔다. 동시에 바람결에 아세톤 냄새가 풍겨왔다. 나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도통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려웠다. 오히려 내 몸에 자석 같은 것이 달려 자꾸만 그녀를 향해 끌어당겨 지는 듯했다.
“우리 서로 갈 길 바쁘니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끝냅시다, 베이커 씨. 셰익스피어 교수의 유산, 어디에 두었죠?”
“어떻게 내 이름을?” 하지만 그녀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셰익스피어 교수의 유산이 어디에 있는지나 말해.”
“돈? 돈이라면 다 은행에─”
“지금 이게 농담 따먹기 하자는 줄 아나. 뒤지기 싫으면 바른대로 대답해 이 새끼야. 닻으로 가는 길 어디에 숨겼어!”
“아니 씨발 이게 무슨, 내가 도대체 뭘 숨겼는데?”
“발뺌하시겠다? 좋아. 네가 말 안해준다고 못 찾을 내가 아니지.”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갑자기 숨통이 조여온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목에 가져다 대었지만, 누군가 물리적으로 목을 조르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떨구자 침이 질질 새어 나오고 눈알이 튀어나오려 했다. 나는 서 있을 힘조차 없어 그대로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진다. 숨을 쉬기 위해 몸부림쳐 보았으나 맨살이 땅에 쓸려 찢겨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귀에서 삐─하는 소리가 들린다.
벌건 대낮 런던 한복판에서 살해당한다. 나는 내가 처한 맥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도무지 곱게 죽어줄 수가 없다. 그러나 손발이 저리고 자꾸만 힘이 빠진다. 움직임이 둔해져 간다. 나른하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무언가 카붐! 하고 와장창!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갑자기 숨통이 트인다. 나는 미뤄둔 숨을 쉬느라 허겁지겁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무언가 부서지고 부러지고 찢어지고 터져나가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보자, 맞은편에서 그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잘 지냈어, 글쟁이? 보아하니 잘 지낸 거 같지는 않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까 엄청 반갑지 않아?”
너무 반가운 나머지 소름이 확 끼친다. 나는 이게 현실인지 저승인지 당최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알프레아 헉슬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헐레벌떡 달아나버렸다. 결국 나는 목이 졸려 죽어버렸고, 지금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사후 세계의 그것이겠구나 싶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도망가자. 대충 때려눕히기는 했지만, 마법사를 상대로 방심은 금물이란 말이지.” 헉슬리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나는 거의 질질 끌려가듯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