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Hamersley
[ We cast anchor lowered it into the water off a small island. ]
VII.
송곳은 단번에 뽑혀 나갔다. 상처가 거칠게 벌어졌고, 출혈은 치사량을 가볍게 넘겼다.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 몸의 모든 감각으로부터 배제되고 있었다. 의식은 점점 아득해져만 가는데, 설상가상으로 호흡까지 쉽지 않았다. 숨 쉴 때마다 자꾸만 목구멍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나는 상처 부위를 두 손으로 꽉 눌렀다. 끔찍한 통증이 다시금 전신에 휘몰아쳤지만, 그래도 다행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그래, 모름지기 사내새끼라면 그 정도 근성은 보여줘야지.”
짐승은 여전히 나를 따라오고 있었지만,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저 반대편으로 막대기 같은 걸 들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청바지에 가벼운 셔츠 차림이 꼭 봄날에 소풍 나온 행락객 같았다. 동굴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사실 그 무엇도 이 동굴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사내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내게 다가왔다. 나를 깔아뭉개고 있는 짐승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상황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서, 나는 환각을 의심했다. 애당초 이곳 동굴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극한의 통증이 이런 허깨비를 그려낸다고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내는 환각의 산물이 아닌 듯했다.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짐승이 몸을 움직였으니까.
얼마 안 가 짐승은 아주 손쉽게 사내를 산산조각으로 찢어버릴 터였다. 사내의 죽음은 내 죽음만큼이나 분명했는데, 그걸 알고도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피 섞인 한숨을 바닥에 왈칵 토해냈다. 이상하게도 점점 숨 쉬는 게 편해지고, 고통이 물러가 나는 아주 평온했다. 이것이야말로 죽음이구나. 그런 생각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VIII.
헉슬리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런던 서부 중심가에 위치한 펍이었다. 무언가 중요한 축구 경기가 있는지 펍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벽에 걸린 큼지막한 TV에 모두의 시선이 쏠려있고, 어느 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응원가를 부르느라 우리 쪽 테이블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나를 보았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테니까.
맥주 석 잔을 원샷 때렸는데도 도무지 진정되질 않는다. 손이 떨리고 자꾸만 식은땀이 흐른다. 속이 울렁거리는 게 까딱 긴장을 풀면 그대로 다 게워내 버릴 거 같았다. 이런 몸 상태로 술을 마시는 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시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다. 헉슬리가 바텐더로부터 아일랜드 위스키를 병 채로 가져왔다. 나는 위스키를 맥주잔에 따라 붓고서는 물 마시듯 허겁지겁 들이켰다. 그제야 혈관으로 알코올 도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잘 맞지 않는 초점을 억지로 맞춰가며 헉슬리를 보았다.
“도대체 무슨 수로 날 찾은 거야?”
“원래는 뭣 좀 부탁해볼까 싶어서 찾아온 건데, 운이 좋았지. 누가 대낮 런던 한복판에서 마법을 쓰길래 마력 파동을 뒤쫓아봤더니 거기 네가 있을 줄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송장 치를 뻔했잖아~.” 마법사라는 말에 나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마냥 화들짝 놀라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텔레비전 속 축구 경기에 쏠려있고, 우리 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헉슬리조차 딱히 주변의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마법사라고? 그런 게 왜 런던에서 설치고 다니는 거야.”
“그 새끼 붙잡아놓고 족쳐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 그보다 네가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요 몇 달간 무얼 하고 다녔길래 대낮부터 마법사한테 목 졸려 죽을 뻔한 건데.”
“내가 알고 있었어야 했다고? 난 감도 안 오는데…. 아, 그러고보니 나보고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의 유산을 숨겼다고 하더라.”
“숨기고 있는 거야?” 헉슬리는 노골적으로 그렇게 물어왔다.
“딱히 숨기는 건 없는데, 정확히 뭘 이야기하는 건지를 모르니까.”
“흠, 일단 널 죽이는 게 목적은 아닌 거 같으니 아마 괜찮을 거야. 내가 런던에 있는 동안에는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할 테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되도록 사람 많은 길로 다녀. 오늘처럼 한적한 곳은 절대 피하고.”
“너는 언제까지 런던에 있을 건데?”
“당연히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있어야지. 애당초 그것 때문에 널 찾으려 했던 거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너 알렉스 해머즐리랑 얼마나 친해?”
“알렉스 해머즐리? 고고학 하는 알렉스 해머즐리 말하는 거야? 네가 그분을 어떻게 알고.”
“앞뒤 사정 다 말하면 한세월인데.”
“걱정 마. 나는 가진 게 시간뿐인 사람이니까.” 이대로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최대한 헉슬리와 같이 있는 편이 내게도 도움이 된다. 까놓고 말해 그녀 곁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니까. 대화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헉슬리는 위스키 남은 걸 끝마치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그 장벽의 존재가 평범한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평범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장벽은 완벽하지 않고, 가끔은 뒤틀리기도 한다. 그 사소한 뒤틀림에 휩쓸려 장벽 밖으로 튕겨져 버린다면, 끝장이다. 거기서부터는 마법사와 사냥꾼의 세계니까. 상식 외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헉슬리는 ‘사소한 뒤틀림’에 주목했다. 은빛 뱀은 사소하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의 몸집만큼이나 초대형이었다. 장벽 안에서 은빛 뱀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불가능을 설명하기 위해 헉슬리는 가설을 하나 세워보았다. 그녀가 사원 아래에서 아르덴 베이커를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몇 번의 사소한 뒤틀림을 경험한 끝에 장벽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였다.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식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은빛 뱀에게 잡아먹힐 뻔했다. 실제로 헉슬리가 아니었다면 아르덴 베이커는 잡아먹힐 ‘뻔’ 이상의 일을 당했으리라.
하지만 이 가설은 앞뒤가 맞질 않았다. 조금만 조사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아르덴 베이커는 뒤틀림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의 과거는 여타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이 깨끗하다. 그리하여 헉슬리는 두 번째 가설을 세웠다.
틀락스칼라의 고산지대에 거대한 은빛 뱀이 나타나 등산객을 공격한 적이 있다. <멕시코시티 애드버타이저>가 관련 기사를 1면에 실었다. 평소였다면 추락사 정도로 마무리되었을 사건이었다. 근처에 목격자도 없어서 사건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은빛 뱀은 유명 저널의 1면에 실렸고, 수십만 구독자가 간접적으로나마 손님의 존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당시 약 3개월 동안 장벽은 무너져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헉슬리는 이 사실을 종합해 지인들에게 알렸으나, 신통한 대답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현재로서는 알렉스 해머즐리의 광기와 집착이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였다. 그러나 헉슬리는 관계자가 아니었고, 외부인으로서 조사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네 이름이 보이더라고. 알렉스 해머즐리는 셰익스피어 교수 밑에서 연구했고, 셰익스피어 교수가 네 은사라고 했었잖아. 어떤 식으로든 접점이 있겠구나 싶었지.”
헉슬리의 추리는 타당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만큼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친밀한 것은 아니었다. 알렉스 해머즐리는 사적으로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대단히 지적인 학자였으나 사교적이지 못했다.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필생의 연구에 대한 끝없는 집념이 그를 좀먹고 있었다. 가끔 알렉스 해머즐리는 고립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따금 교정을 걷다 보면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알렉스 해머즐리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두꺼운 책을 읽었다. 내가 반갑게 말을 걸면 늘 성심성의껏 대꾸해주었다. 그러나 좋아서 대꾸해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예의상. 귀찮아하는 게 확연히 느껴져서, 나중에는 그를 보아도 말을 걸지 않았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알렉스 해머즐리는 늘 벤치에 혼자였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이 쓸쓸하다고 느껴진 적은 없었다. 군계일학을 쓸쓸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확실히 접점이 없는 건 아닌데…. 그래서 나보고 알렉스 해머즐리에 대해 알아봐달라는 거야?”
“알렉스 해머즐리뿐만이 아니야. 셰익스피어 교수가 이끌던 고고학팀 전체를 다 조사해줘.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뭐든 발견하면 바로 알려주고.” 말하는 모양새가 농담 같지는 않았다. 지난번 멕시코시티 때와는 영 딴판이랄까. 어쩌면 그 ‘장벽의 붕괴’라는 사태가 그만큼 심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나는 그녀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다만 한 가지.
“다 알겠는데 왜 하필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사설탐정 회사 같은 데에 의뢰하면 훨씬 빠르고 상세하게 조사해줄 거 같은데.”
“클라우디오스 선서 때문에 안돼. 일반인에게는 겹차원 관련 이야기를 할 수 없거든.”
“나는 경험자니까 괜찮은 거고?”
“경험자에다가 거어어의 관계자니까. 물론 나도 맨입으로 부탁하는 거 아니다. 충분히 사례할게. 조사에 필요한 비용도 내가 다 지불할 거고.”
“우리 사이에 사례는 무슨. 그냥 나중에 밥이나 사.”
“우리가 무슨 사인데?”
“죽을 뻔한 걸 두 번이나 살려준 사이라고 할 수 있지.” 내 말에 헉슬리는 허벅지를 때려가며 깔깔 웃었다. 멕시코에서 한 번 잉글랜드에서 한 번 내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생명의 은인인데 시시콜콜한 조사를 도왔다고 따박따박 사례를 받는 것이 좀 그렇다. 양심의 가책은 아니겠지만 그거랑 아주 다르지도 않았다.
“하여튼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해 볼게.”
“뭐든 알아내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꼭 내 폰으로 연락하고.” 헉슬리는 내게 구식 블랙베리를 내밀었다. 번호를 입력할 때, 헉슬리가 나를 어떤 이름으로 저장할지 궁금했다. 본명을 알려준 적 없으니 결국 아르덴 베이커나 글쟁이로 저장하려나.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른 채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내 아이폰 화면에 그녀의 번호가 나타났다 금방 사라졌다.
“어, 잠깐만.”
“……?”
“너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런던에 있을 거라면서. 만약에 내가 알렉스 해머즐리의 조사를 끝마치면 너는 떠나는 거야? 그럼 아까 그 마법사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는 거잖아.”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일단 조합에 보고했으니 패트롤이 움직이겠지. 네가 아무리 경험자라고는 하지만 마법사가 일반인을 공격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심각한 일이니까. 아마 조합에서도 기를 쓰고 잡아들이려고 할 거야. 정 뭣하면 내가 직접 붙잡아 조져놓고 가면 되지.” 구구절절 말은 많았지만 무엇하나 근본적인 해결책처럼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나는 최소한의 호신을 위한 대책이 필요했다.
“근데 그런 것도 총에 맞으면 죽나?”
“상대가 마법사면 총보다 칼이 백 배 낫지. 너무 긴 건 별로고 약간 이 정도.” 헉슬리는 두 손을 들어 어깨너비 정도로 벌려보았다. 그녀의 대답에도 나는 혼자 생각해본 권총 밀수 계획을 아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
IX.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잠시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마치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눈을 뜨기가 몹시 겁났다. 그만큼이나 피를 흘렸으니 죽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동굴의 모습은 전과 다르지 않았으나, 어째서인지 같은 장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모습이 같을 뿐인 다른 장소. 굳이 그 장소에 이름을 붙여보라면, 나는 저승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껏 나는 사후세계가 존재할 거라 생각해본 적 없었다. 진지한 말투로 지옥을 논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웃음을 참느라 죽을 맛이었다. 독실한 어머니마저도 내게 천국을 증거하진 못하셨다. 헌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곳이 저승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천국과 지옥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실 굳이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내 죽음이 기정사실인 상황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다를 바 없을 테니까.
“어쩌면 죽지 않은 걸지도….”
나는 상의를 들춰 옆구리를 확인했다. 관통상은 치명상이었다. 찢어진 상처의 틈새로 흘러나온 피도 상당했다. 그러나 옆구리에 상처는 흔적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바깥세상에서 통용되는 대다수의 논리와 법칙이 여기서는 무용지물이니까. 이쯤 되니 눈앞의 상황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사후세계인지 좀체 확신이 서질 않았다.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바닥에 놓여있는 랜턴의 모양이 내 것과 크게 달랐다. 건전지를 따로 챙길 필요가 없도록 자가발전이 가능한 랜턴을 챙겨왔으나, 바닥에 놓여있는 것은 발전용 손잡이가 달려있지 않았다. 게다가 크기도 이쪽이 훨씬 크다.
그 와중에 발소리가 들렸다. 미약했으나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나는 서둘러 몸을 숨겼다. 커다란 바윗덩이에 등을 기대고 퇴로를 살폈다.
“뭐야, 이 새끼 어디 갔어?”
남성의 목소리였다. 억양이 거칠어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었지만, 일단은 영어인 듯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단지 짐승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신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저 사람이 내게 우호적일지 알 수 없기도 하지만, 내가 저 사람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것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짐승에게 공격당하는 사이에 나는 식량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만약 상대가 식량을 가지고 있고, 그걸 나와 나누길 거부한다면, 내가 어떻게 돌변할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왔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