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울수록 오래간다는 말이 있다. 돌에 새긴 기록은 만년을 가고, 나무에 새긴 기록은 반만년을 가고, 종이에 새긴 기록은 천년을 간다. 그리고 기록 매체가 가벼워질수록 저장 기한은 급속도로 짧아진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손수 만든 도구를 단자에 연결했다. 과거의 고고학은 유물을 발굴하고 잃어버린 사원을 모험하는 멋진 일이었다. 물론 시간이 흘렀다고 고고학이 그 본질을 잃은 것은 아니다. 고고학은 언제나 지난 시절을 들여다보는 학문이었다. 다만, 무엇을 통해 들여다보는가. 문제의 핵심은 거기 있었다. 과거의 고고학이 비석이나 반쯤 썩은 종이를 통해 들여다보았다면, 오늘날의 고고학은 모니터가 전부였다. 나는 손수 만든 단자에 하드디스크를 연결했다. 고물상의 밑바닥에서 찾아낸 녀석이었다.
“그건 원래 어떤 출판사의 서버에서 사용하던 물건이요. 재미있는 소설은 들었겠으나 고고학적인 발견은 힘들 거요.” 고물상 주인장이 말했다.
“뭐, 그래도 재미있는 소설은 읽을 수 있겠네요.” 나는 물건값을 지불하고 하드디스크를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 돌아와서 상태를 확인했을 때는 그리 좋지 않았다. 플래터는 괜찮았으나 헤드의 상태가 끔찍했다. 그 상태로 연결했다가는 플래터마저 아작낼 듯싶었다. 나는 일주일에 걸쳐서 하드디스크를 고쳐내었다. 과거의 전자 제품을 다뤄야 하는 고고학자에게 복수 전공으로 컴퓨터 공학은 필수다. 내가 제대로 했다면 모니터는 몇 세기 전의 기록으로 향하는 길을 내게 보여줄 터였다.
이윽고 모니터 전체가 숫자와 알파벳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텍스트는 군데군데 비어있어 연속되지 못했고, 내가 하는 일이라곤 그사이에 들어갈 알맞은 내용을 찾아 넣는 것뿐이었다. 맥락을 통해 유추해야 하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시도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때때로 고고학이 아니라 스도쿠 문제를 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제대로 채워 넣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초고난도의 스도쿠를. 그렇지만 뭐라고 부르던 이 작업이 너무 재미있으니 이것 참 천직이라 하겠다. 나는 밤을 새워 빈 곳을 채워나갔다.
방대한 데이터 사이에서 내가 발견한 것이라고는 고작 다섯 개의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마저도 나는 읽을 수 없었다. 나는 평소 알고 지내던 언어학자에게 화면 그대로 스크린샷을 찍어 메일로 첨부하였다. 답장은 몇 주 뒤에야 돌아왔다. 그는 이것이 중세 국어에서 쓰였던 경기도 방언의 한 일종이라고 했다. 친절하게도 각각의 단어가 오늘날 어떤 단어와 호응 되는지도 덧붙여주었다.
“초능력자 서울역 보름달 방화 미치광이.”
나는 그가 해석해준 단어를 소리 내 읽어보았다. 그러나 조사도 없는 단어만으로는 어떤 식으로도 의미가 통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살펴보았지만 내가 실수한 부분은 없었다. 이 다섯 단어의 사이에는 그 어떤 조사나 문장 부호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섯 단어는 다섯 단어로서 완전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시 메일을 보내보았으나 그는 “이것은 문장이라기보다는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라고 대답했다.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 소설일 리 없었다. 맥이 빠져서 침대에 누워버렸다. 꿈속에서 보름달 뜬 밤에 미치광이 초능력자 하나가 서울역을 불태웠다. 콘크리트로 만든 역이 지푸라기처럼 활활 타올랐다.
“개꿈도 무슨 이런 개꿈을….” 아마도 아쉬워서 그럴 것이었다. 고고학자로 산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쉬움에 발목 잡히기에 현실은 너무나도 비정한 것이었다. 일하지 않으면 벌어먹을 수 없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작업하던 하드를 연결했다. 화면 가득한 텍스트에는 여전히 빈 공간이 가득했다. 나는 끼니도 거르고 그 맥락을 찾아 빈 곳을 채워나갔다. 작업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서울역이나 초능력자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이번 하드에서도 쓸만한 내용은 찾지 못했다. 나는 다른 하드를 연결했다.
그 다섯 단어에 대한 생각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밥을 먹을 때도, 하드디스크 작업을 할 때도, 심지어는 여자친구와 섹스를 할 때도 그러했다. 다섯 단어일 뿐인데, 고작 다섯 단어일 뿐인데도 그것들은 내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숟가락 속에 초능력자가 있었고, 하드디스크 안에 보름달이 있었고, 섹스하는 도중에 많은 것이 불타올랐다. 나는 미쳐가고 있는 듯했다.
밥도 하드디스크도 섹스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침대에 누운 채로 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초능력자와 서울역과 보름달과 방화와 미치광이에 대한 생각은 가실 줄을 몰랐다. 그 다섯 단어의 행간에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나는 온갖 상상을 하며 끙끙 앓았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억압받는 세상과 그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서울역을 방화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팬티 하나로 몇 백번의 싸움을 주고받은 노숙자들의 이야기. 야구에 미친 역무원과 불쟁이 투수의 짜릿짜릿한 감전 야구 이야기. 명절 증후군에 시달린 나머지 결국 몇 백년 전의 조상을 소환하고야 마는 어느 며느리의 이야기까지. 단어가 다섯 뿐인데도 거기서 피어나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몇 세기 전 어떤 출판사의 서버에서 알 수 없는 글쟁이 하나가 이 다섯 단어로 무슨 작품을 썼다. 그게 어떤 글일지는 짐작도 가지 않지만, 상상은 자유일 것이었다. 그리고 상상의 끝에서 나는 볼펜을 집어 들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지면에 옮겨놓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머릿속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터였다. 그간의 상상이 화산 터지듯 볼펜 끝에서 터져나왔다. 내 기념비적인 첫 문장은 이러했다.
“서울역은 졸라짱쎄서 온갖 역들 중에서 최강이엇다. 인천공항이나 김포공항도 이겼따. 다덤벼도 이겼따.”
덧붙이는 말
이 작품은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브릿G 덕분에 쓰게 된 단편입니다. 브릿G에서는 작가들이 모여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단편을 쓰는 백일장이 종종 열리는데, 이 작품은 "추석 기념 소재 제한 백일장(줄여서 소일장)"에 출품하기 위해 적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초능력자 서울역 보름달 방화 미치광이라는 다섯 개의 주제를 가지고 단편을 써야 했지요. 저는 이 다섯 소재를 매끄럽게 연결시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그래서 하나로 뭉뚱그려버렸습니다. 소재를 뭉갰더니 나머지는 일사천리더군요.
저는 이 글을 쓰면서 "모든 뛰어난 글쟁이도 처음에는 어설프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역사는 시작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내기 위해 미래의 고고학자를 등장시켜야 했지요. 분량은 짧지만 내용은 충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