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Hamersley
[ We cast anchor lowered it into the water off a small island. ]
X.
“내 알 바 아닌데.”
- 알프레아 헉슬리
XI.
사무실은 난장판이었다. 서류 상자가 엎어져 바닥은 종잇조각으로 너저분했다. 그 새하얀 종이의 언덕 위로 시체는 참담했다. 여자 하나가 젖가슴을 드러낸 채 쓰러져있다. 으스러진 뒤통수의 틈새로 뇌수가 종이에 스몄다. 공기에서 피 냄새가 나 숨을 쉴 때마다 속이 메스꺼웠다. 자꾸만 구역질이 치올랐다.
“도대체 이게 무슨…….”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리자, 문간에 레미 헤이즐이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나에게 잠깐 머물렀다가 곧바로 시체로 향했다. 그녀의 비명은 높고 날카로워 멀리까지 닿았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무실 앞은 금세 북적거렸다. 경황없는 와중에도 나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간을 막고 버티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이 이상 사건 현장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누가 신고를 넣었는지 경찰 대여섯 명 정도가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주변을 정리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내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나는 변명 한 번 못해보고 주요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백팩에 들어있던 택티컬 나이프가 문제였다. 건물 내부의 CCTV가 내 결백을 증명해주었지만, 경찰들은 쉽게 의심을 무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그런 걸 들고 돌아다니냐고. 뭔가 있는 거 아니야?” 그들은 내가 이 사건의 공범이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언젠가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택티컬 나이프를 휘두르고 다닐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불쾌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나를 심문하는 경찰들의 말투 속에서 인종차별의 맛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나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고 그들 이상으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지만, 결국 경찰들이 보기에는 노란 피부의 동양인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막판에는 경찰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 부숴버리고 싶어졌다.
마법사에게 위협을 당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칼을 들고 다녔다. 이따위로 대답했다간 정신병원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때문에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한국에서 포병으로 군 생활을 했었는데, 그때부터 택티컬 나이프를 가지고 다니면 마음이 뭔가 안정되더라고요.” 따지고 보면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택티컬 나이프가 마음의 안정을 주는지 아닌지 알게 뭔가. 그러나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음으로 경찰들은 말의 헛바퀴 속에서 개고생 하게 될 것이다. 한국 정부에 수사 협조를 요청해도 받아볼 수 있는 정보는 ‘윤 아무개, 한국에서 육군 포병 병장으로 만기 전역’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급조해낸 변명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더 알아낼 게 없었음에도 본보기 삼겠다는 식으로 두 시간 가까이 나를 앉혀놓고 떠들어대었다.
“협조 감사합니다. 추가 조사를 위해 나중에 다시 경찰서를 방문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더라도 꼭 받으셔야 합니다.” 취조실을 나가려는데 경찰관 하나가 신신당부했다. 택티컬 나이프를 압수당한 데다가 이미 기분을 잡칠 대로 잡친 나는 대답도 않고 적당히 고개만 끄덕였다.
나가는 길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레미 헤이즐이다. 바쁠 것도 없는 까닭에 나는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았다. 나는 그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지만, 공감하지는 못했다. 죽은 그녀는 죽어서야 비로소 나와 연이 닿았지만, 레미 헤이즐과는 살아서 연이 닿았던 사이다. 슬픔의 깊이가 같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을까. 뭐라 위로해야 할지 좀처럼 단어들이 떠오르지가 않아서, 나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그냥 말없이 옆에서 기다릴 뿐이었다.
“네가 죽였지.” 그녀는 대뜸 고개를 들더니 내게 말했다. 나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진심으로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난 안 죽였어.” 내가 대답했다.
“그럼 사무실에는 왜 온 건데.”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중요한 문제로.”
“중요하다니 어떤 게?”
“그 이야기는 지금 하기 좀 그렇고, 나중에 따로 찾아갈게.”
“하지만…….” 레미 헤이즐은 말끝을 흐리더니 “알았어. 나 먼저 가볼게.” 하며 경찰서를 나가버렸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그대로였다. 혼자 가만히 앉아있기도 뭣해서, 나도 곧 경찰서를 나왔다.
시간이 지나도 메스꺼움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샐러드로 저녁을 대신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사무실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죽은 사람을 본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경험은 많이 해본다고 익숙해지는 종류의 것은 아니리라. 나는 뒤척거리다가 밤이 한참 깊어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이틀 뒤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고 했다. 실마릴리온을 읽고 있었던 까닭에 모든 종류의 방해가 귀찮았지만, 그래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덕분에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범인은 어떤 자료를 훔치기 위해 사무실에 잠입했다. 어디에 그 자료가 있는지 알지 못했기에, 범인은 상자를 하나하나 뒤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피해자가 들어왔고, 목격자를 없애야 했기에 기다란 트로피로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가격해 죽였다. 그리고는 전후 관계를 완전히 뒤바꾸기 위해 상황을 조작했다. 옷을 벗겨 강간으로 위장했고, 어질러진 사무실은 강간 후에 주변을 어지럽힌 것처럼 꾸몄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해 조작은 상당히 허술했던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의 경찰관은 단 이틀 만에 이만큼이나 알아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정보를 더 캐내기 위해 나는 그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다행히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라는 분께서 리스트를 만들어두셨더라고요. 저희가 밤을 새워서 자료 분류를 했습니다. 그 결과 아무것도 사라진 게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요. 참 다행이지 않습니까?”
“그거 확실한 거예요?”
“물론입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확인했거든요. 근데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CCTV 어디에도 범인의 모습이 안 찍혔다는 거죠. 대낮의 캠퍼스에서 범행이 일어났는데 목격자조차 없어요! 범인은 귀신인 걸까요?”
“…생각해보니 그러네! 급한 일이 생겨서 전화 끊습니다!”
나는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곧장 다락방으로 달렸다. 이렇게나 분명한 모순을 나는 왜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리스트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니까.
레미 헤이즐이 떠난 다음에야 다락방의 상자를 발견했다. 그러니 정말 리스트라는 게 있다면 나중에라도 내게 상자 하나가 빠졌다고 연락이 왔어야 옳다. 하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경찰관도 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이 모든 게 의미하는 바가 너무나도 명확해 나는 소름이 쫙 돋을 지경이었다.
애들린의 리스트에는 다락방의 상자가 누락되어 있다.
작성할 때부터 다락방의 상자를 리스트에서 제외할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그럴만한 이유가 생겨 리스트를 수정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녀 자신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삭제하였는지, 누군가가 겁박하여 강제로 지우게 하였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몰래 지워버렸는지도 지금은 알 수가 없었다. 추측조차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레미 헤이즐이 그 리스트를 인쇄한 시점에 이미 다락방의 상자는 리스트에서 빠져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락방에는 상자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내용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상자의 겉면에 적혀있는 ‘Gate Island’라는 글자만이 내가 다른 상자와 헷갈린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전에 청소하면서 어딘가에 치워둔 게 아닌가 싶어서, 다락방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별거 없었다.
셰익스피어 교수의 미공개 자료 일부를 도둑맞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 도둑맞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XII.
사내는 이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하품했다. 청바지에 가벼운 셔츠 차림이 꼭 봄날에 소풍 나온 행락객 같았다. 지팡이 대신 칼을 짚고 선 모습이 어쩐지 낯익다. 그러나 어디서 보았는지는 끝끝내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숨어서 살피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나는 고민 끝에 결국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빨빨대며 돌아다니는 걸 보면 아픈 데는 없나 보군.” 사내가 말했다.
“귀하는 누구시죠? 이 동굴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지금 상황에 내가 누군지가 그렇게나 중요한가?”
“아니 뭐 글쎄요…. 근데 저희 혹시 구면인가요?” 내가 묻자 사내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지랄 났네 진짜. 우리가 구면이냐고? 평면이다 이 새끼야. 너 도대체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냐. 아니, 어디서부터 기억 못 하는 거냐?”
나는 일단 기억나는 대로 털어놓았다. 다만, 탐험의 모든 부분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저 기억을 잃기 몇 분 전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다.
말을 끝내자 사내가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신을 잃은 뒤의 이야기는 상당히 비현실적이었다. 그토록 사납던 짐승을 홀로 해치웠다고 말할 때, 내 판단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내가 말했다.
“안 믿으면 어쩔 건데.” 사내는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 안 된다. 나는 내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손 가득 피를 묻혔다. 꿈이라 하기에는 그 감촉이 너무나도 생각했다. 그러나 상처는커녕 핏자국의 흔적조차 없었다. 기억과 현실이 합치하지 않는다. 가장 명확해야 할 삶과 죽음조차도 불분명했다. 나는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했다.
담배가 필요하다. 그 충동은 급격하여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뱃갑을 꺼내어 한 개비 물었다.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쉬자 몸 구석구석으로 니코틴이 퍼져나간다. 내가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울 동안 사내는 아무런 말도 않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그쪽은 뭐 하는 사람이길래 여기 있는 거죠? 이 섬은 발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곳인데.” 신발 밑창으로 담배를 비벼끄며 나는 물었다. 질문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곧장 튀어나왔다. 사실 가장 먼저 물어봤어야 할 질문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너 아니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어.”
“…그게 무슨?”
“아픈 데 없으면 슬슬 출발하지. 난 여길 빨리 뜨고 싶거든?” 사내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벌써 저만치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민했다. 혼자 행동하기에 이 동굴은 너무 위험하지만, 사내를 따라간다고 해서 그 위험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은 길었고 판단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XIII.
“숨 쉬지 마.” 헉슬리가 말했다.
“그거 그냥 죽으라는 소리잖아.” 내가 말했다.
“입도 뻥긋하지 말고.” 아무래도 그녀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듯했다. 툴툴거리고 싶어도 입을 닫은 채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나는 멀찍이 거리를 두고서 그녀가 뭘 하는지 지켜볼 뿐이었다.
다락방의 한가운데에서 헉슬리는 가져온 종이 쪼가리에 불을 지폈다. 종이도 라이터도 별로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는데, 피어오르는 연기는 보라색 분홍색 붉은색 주홍색 노란색 등을 거치며 오색찬연하게 다락방을 채워나갔다. 반짝이는 입자들은 무작위로 움직이는 듯 보였지만, 헉슬리는 그러한 움직임 속에서 무언가 의미를 읽어내고 있었다. 내가 숨 막혀 죽어버릴 때쯤 그녀는 창문을 열어 연기를 밖으로 내보냈다. 방심한 나는 연기가 채 밖으로 빠져나가기 전에 숨을 들이쉬었다가, 까맣게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훈련병 시절 화생방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게 내가 숨 참으라 했잖아.” 캑캑거리는 나를 향해 헉슬리가 한 소리 했다. 나는 억울했지만 뭐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별수 없이 계속 캑캑거리는 쪽을 택해야만 했다. 다행히 기침은 금방 가라앉았다.
“여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어.” 연기가 빠지고도 다락방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헉슬리가 대뜸 말했다.
“아니, 문제가 없다고?”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딱히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느낌이 왔다. 곧바로 헉슬리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은 그러한 까닭 때문이었다. 지금 와서는 그 결정을 조금 후회하고 있지만. 전문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문제없다'고 선언해버린다면 아마 누구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내 말은 이 집에 걸려있는 마법에 문제가 없다는 거야. 파괴되지도 않았고 교란당한 적도 없는 거 같아. 그러니 원인은 다른 데 있다는 말인데….”
“마법? 무슨 마법. 이 집에 그런 게 걸려있단 말이야?”
“말 안 해줬던가? 펍에서 마셨던 그 날 밤에 내가 친구한테 전화해서 사정사정했거든. 유럽에서 이쪽 마법 관련해서는 손가락 안에 드는 마법사니까 어중이떠중이가 쉽게 우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내 알 바 아니고, 하여튼 도둑이 들었다니까? 도둑이 들었는데 마법이 다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없기는 왜 없어. 이 마법은 네가 허락한 적 없는 방문객의 침입을 막게 되어있어. 도둑이 들었어도 마법 걸어놓기 전에 들었다는 소리지." 그녀의 말에 나는 마지막으로 상자 속 내용물을 보았던 날을 되짚어보았다. 레미 헤이즐에게 서류 상자를 넘기고 다락방을 청소하던 게 지난달 말이니까 대충 스무날쯤 전의 일이다. 대낮의 런던 한복판에서 죽을 뻔하다 헉슬리 덕분에 겨우 살아난 건 닷새 전이었던가? 계산해보면 도둑맞을 수 있는 기간은 대충 열나흘 언저리. 그 중 어느 날에 도둑이 들어 상자 속 내용물을 쓸어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 집에 있으면 마법사한테 개죽음당할 일은 없으리라. 제대로 이해는 못 했지만 하여튼 마법이 지켜줄 테니까.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집돌이homebody로서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근데 뭘 도둑맞았길래 나를 부른 거야? 돈깨나 나가는 물건이었으면 경찰부터 불렀을 텐데.” 헉슬리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나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한 듯했다.
“별 대단한 건 아니고, 이 상자 안에 있던 건데.” 나는 손을 뻗어 근처에 있던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헉슬리는 카키색 코트를 벗어 옆에 두고 상자를 살폈다. 뚜껑을 열어 내부를 확인하고는 별다른 게 없나 돌려보던 그녀는 상자의 옆쪽에 두꺼운 마커로 쓰여진 글씨를 발견했다.
“야, 글쟁이! 도둑맞았다는 게 게이트 아일랜드 관련 자료였어? 이런 게 있었으면 처음부터 나한테 알렸어야지!!” 그녀는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대로 폭발해버렸다.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심으로 분노와 짜증이 뒤섞인 헉슬리의 모습은 맹수의 그것과 닮아있다. 나는 찔끔이라도 지리지 않기 위해 온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도둑맞자마자 경찰 말고 너한테 연락한 거 아냐…….”
“도둑맞기 전에 이런 게 있다고 알려줬어야지!” 되도 않은 변명에 헉슬리는 더욱 불타올랐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억울하다. 헉슬리는 나와 만난 그날 밤에 친구를 불러 이 집에 무슨 마법인가를 걸어두었다고 했다. 요컨대 그녀와 만났을 때는 이미 도둑맞은 후였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뭐라 뻥긋하면 헉슬리에게 잡아먹혀 버릴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내 잘못입네 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 안에 정확히 뭐가 있었는데.”
“막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었어. 나무 같은 거로 만든 이상한 조각상이랑 뜨문뜨문 쓰여진 메모 정도?”
“메모 내용은.”
“어, 솔직히 자세히 본 게 아니라서 내용은 잘 기억 안 나는데─” 잔뜩 찌푸려진 눈썹 사이로 2차 폭발의 징후가 보였던 탓에 나는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무슨 동굴 이야기가 있었어. 그리고 조각상은 진짜 이상하게 생겼더라. 막 거미랑 사냥개랑 들소가 뒤섞인 거 같은데 거기에 막 요상한 게 달려있고."
"이거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의 개인 자료? 아니면 다른 누가 이거에 대해서 알아? 알렉스 해머즐리가 이걸 알았을까?”
“게이트 아일랜드가 뭐길래 그러는 건데. 중요한 거야?”
“이게 중요하냐고? 아니, 이건 그 이상이야. 게이트 아일랜드에는 장벽을 작동시키는 장치가 숨겨져 있거든. 그러니 알렉스 해머즐리가 그 섬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돼. 내가 생각한 게 다 맞아떨어지는 거라고!!” 헉슬리가 말했다. 그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나 역시 바라는 일이었으므로, 알렉스 해머즐리가 게이트 아일랜드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결국 내 할 일이 될 터였다. 그런데 해머즐리는 정말 그 섬에 대해 뭐라도 알고 있었을까?
적어도 나는 확신할 수 없었고, 확신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알렉산더 해머즐리는 침묵을 통해 모든 걸 감추려던 사람이었으니까. 비밀이 많았다기보다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음으로써 그의 모든 것이 비밀 취급당해버렸다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고약한 신비주의자.
하지만 단 한 사람, 레미 헤이즐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홀로 그쪽에 기대를 걸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