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Hamersley
[ We cast anchor lowered it into the water off a small island. ]
XIV.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앵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살았다. 그 어떤 지도에도 실려있지 않은 미지의 영역. 그 자그마한 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나의 은사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 교수 덕분이었다. 앵커는 원래 그녀의 연구였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그녀의 스승 앤드루 피터슨 교수가 앵커에 대해 연구했었다. 피터슨 교수가 어떠한 경로로 앵커에 대해 알게 되었는지는 들은 바가 없다. 내가 처음 셰익스피어 교수를 만났을 때, 피터슨은 죽은 지 오래였으니까. 셰익스피어 교수는 죽은 스승의 유지를 이어받은 셈이었다.
시기상으로 볼 때 Gate Island라고 명명된 섬은 지난 세기 중반 이후에나 생겨났으며, 앵커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거라고 그녀는 주장했다. 셰익스피어 교수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비교적 난해했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곳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메모를 곱씹은 뒤에야 숨겨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연구의 성격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고고학이란 과거의 인물들이 남긴 물질적 자료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복원하고, 그 시대가 어떻게 변하였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앵커의 연구는 결코 고고학의 영역 안에서 성립되지 않았다. 셰익스피어 교수는 아예 다른 학문을 연구하고 있었다. 가장 처음에 든 생각은 구조지질학이었고, 뒤이어 해양화산학이 떠올랐으나, 마지막에는 모든 생각을 접어야 했다. 내가 아는 그 어떠한 학문도 앵커의 연구를 성립시키지는 못했다. 셰익스피어 교수는 미지의 분야를 연구하고 있었다.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 교수는 살아있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앵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 고고학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굳이 나에게 말해줄 필요도 없었을 터였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녀가 죽고 난 이후에야 앵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연구 자료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었으나 남겨진 자료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사실상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 안에서 앵커의 본질을 추측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나는 앵커에 매달렸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 사내는 침묵했다. 나는 사내의 침묵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일설에 의하면 앵커는 동굴 속 호수 한가운데에 있다고 하던데. 그리고 앵커로 향하는 길은 호수의 요정만이 알고 있고.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혹시 호수의 요정이신가요?” 내 질문에 사내는 벌레라도 씹은 듯 끔찍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그런 토나오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니 눈에는 내가 그딴 것처럼 보이냐? 그럴 거면 눈깔은 왜 달고 다니는 거냐.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 사내는 말이 안 나오는 사람치고 상당히 많은 말을 쏟아내었지만,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럼 도대체 댁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데요.”
“거 질문 드럽게 많네. 난 그냥 운반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았냐?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물어봐라.” 잔뜩 짜증을 내면서도 그 끝에, 사내는 흘리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여튼 네가 상상하던 게 뭐던 그 이상일테니, 입 다물고 마음의 준비나 하라고.”
XV.
“본 열차 앞으로 3분 후 카디프 센트럴 역에 도착 예정입니다. 내리시는 문은 왼쪽에 있으며 플랫폼과 차량 사이의 간격이 넓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본 열차 앞으로 3분 후─” 요란하게 지껄여대는 안내방송 소리에 나는 선잠에서 깨었다. 짧지만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해변에서 풍경은 노을 지고 있었다. 나는 백사장을 걷고 있는데, 멀리서 무척 아름다운 여자 하나가 가만 앉아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앞뒤 맥락도 없이 딱 그뿐이었던 꿈. 아마도 개꿈이겠지만, 혹시 미래의 배우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꿈보다 해몽이니까 뭐든 해석하기 나름이다.
나는 두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뒤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그러나 문자 메시지는 집에서 출발하던 이후로 새로운 것이 없었다. 카디프 센트럴 역에서 내린 나는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잡아탔다.
“여기로 가주세요.” 나는 주소가 찍힌 구글 맵스 화면을 기사에게 내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전벨트 하세요.”라고 한마디 했다. 차는 아주 부드럽게 출발했다. 나는 문자로 카디프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알겠다는 대답이 짧게 돌아왔다. 마음이 뒤숭숭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요 며칠간 나는 레미 헤이즐과 연락하기 위해 무던 노력했다. 그러나 나의 얄팍한 인간관계로는 그녀의 거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로 연락하든 간에 그 사건이 있던 날 이후로 레미 헤이즐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린 듯했다. 이것이 나를 노리던 마법사의 소행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알 길이 없어서 나는 매우 조급했다. 나는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알음알음 지인을 소개받아가며 겨우 그녀의 어머니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르덴 베이커라고 합니다. 레미 헤이즐 어머니 되시는지요.”
“맞는데요. 우리 딸이랑은 무슨 사이시죠? 혹시 남자친구인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런던에서 만난 오랜 친구 사이입니다. 요즘 레미가 통 연락이 안 되어서 혹시 무슨 일인지 아실까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딸의 소식은 저도 모르겠네요.” 결국 레미 헤이즐의 어머니 역시 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방금 아르덴 베이커라고 했나요?”
“네.”
“저희 딸이 베이커 씨 앞으로 남겨놓은 게 있거든요. 이걸 가지러 카디프까지 와준다면 정말 고맙겠는데요.”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루고 생각했다. 레미 헤이즐은 내 집 주소를 알고 있다. 나에게 뭔가를 남기고 싶었다면 택배로 부치는 편이 쉽고 간단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배송되는 과정에서 특정한 의도를 가진 누군가에게 물건이 탈취당할 것을 염려했던 걸까? 다행히 런던에서 카디프까지는 두 시간 정도면 넉넉하게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내일 오후쯤에 가지러 가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예정에도 없던 카디프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택시는 시내를 약간 벗어난 주택가에 나를 내려주었다. 작은 정원이 딸린 새하얀 이층 집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처음 뵈는 여성분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미리암 헤이즐이라고 소개했다. 그 이름을 들을 때, 그것이 남편의 성을 따라간 것인지 아니면 레미 헤이즐의 어머니의 성을 따른 것인지 잠깐 궁금했다. 나는 자기소개 비스무리한 걸 해보기도 전에 집안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이렇게 먼 길 와줘서 고마워요. 주말에 여기까지 내려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미리암은 내 앞에 놓인 찻잔에 홍차를 따라주었다. 그녀는 나를 평일에 일하고 주말에 쉬는 보통의 런던 사람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아뇨 뭐 그렇게 오래 걸리는 길도 아니었는걸요. 그보다 레미 연락은 아직 없었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런던 쪽에서도 우리 딸 연락 받은 사람이 없나 보네요.”
“경찰에 신고는 하셨나요?”
“아니요, 아직…….”
“거의 나흘 정도 아무하고도 연락이 안 되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진 걸 수도 있어요. 이럴 때일수록 최대한 빨리 경찰에 실종 신고 넣고 수색하게 해야─” 미리암이 두 손으로 덥석 내 손을 잡았고, 순간적으로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마워요, 베이커 씨. 그렇지만 내 딸은 내가 잘 알아요. 분명 아무 탈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거예요.” 이 말에 나는 머리통이 아주 돌아버리는 기분이었다. 딸이 실종된 거나 다름없는 상태인데도 어쩜 이렇게 대책 없이 태평할 수 있는지. 나는 미리암 헤이즐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를 상대로 어떠한 설득 작업도 결국에는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보다는 돌아가는 길에 내가 직접 실종 신고를 넣는 편이 더 빠르고 손쉽다.
“어머님 의견이 그러하시다면야.” 나는 울화통이 터져나가려는 걸 겨우 억누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레미가 저한테 남겨두었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요?“
“커다란 상자인데 안에 서류 봉투가 가득하더라고요. 아마 무슨 문서 같은 게 아닐런지. 위에 있는데 양이 좀 되거든요. 직접 올라가서 가져와야 할 거 같은데. 미안하지만 내가 허리가 안 좋아서.”
“계단 올라가면 바로 보이나요?” 나는 천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딸애 방 들어가면 알 거예요. 상자가 워낙 커서. 그게 전부 베이커 씨 앞으로 남겨진 거니까.” 나는 찻잔에 남은 홍차를 마저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집에 들어온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한번 수틀리니까 정신적으로 피곤하다. 친구의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지금 제정신이냐고 푸닥거리 했을 텐데.
여기 더 있을 이유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상자만 챙겨 바로 여길 떠나려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럴 수 없었지만.
계단을 올라가자 어디가 그녀의 방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 만들어 걸어놓은 듯한 문패 위로 레베카 헤이즐Rebecca Hazzel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그게 그녀의 본명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지불식간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상자가 당연히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의 자료 정리용 상자랑 똑같이 생겼을 거라고 넘겨짚었다. 그러나 레미 헤이즐의 방에는 그런 상자가 없었다.
아니, 상자로 볼 수 있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너……, 너?” 레미 헤이즐이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오는 무뢰배가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선 채로 얼어버렸다. 마지막으로 레미 헤이즐을 봤을 때도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눈물과 지금의 눈물에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다. 나는 그 차이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문을 닫고서 헤이즐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미리암 헤이즐의 행동과 말이 전부 이해되었다. ‘내 딸은 내가 잘 알아요.’ 그 말 그대로였다. 요컨대 레미 헤이즐은 숨어야 했고, 어머님은 딸을 지키기 위해 말을 지어냈을 따름이다. 속으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퍼부었던 게 죄송스러워진다. 레미 헤이즐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왜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진 거야. 사람들이 다 걱정하더라. 무슨 일인데.”
“나…….”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너무 울어 눈두덩이가 붉다 못해 보랏빛이었다. 나는 헤이즐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셰익스피어 교수님이 돌아가시고 네가 뭔가를 조사하고 있다는 거 알아. 우리 탐사대에 대해서 말이야. 근데 그거 그만둬. 이 말은 꼭 해줘야 했어 너한테만은.”
“그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더 파고들었다가는 너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원래는 나였단 말이야!”
“……?”
“난 미치지 않았어. 난 미치지 않았다고. 난 멀쩡해. 난 제정신이야.” 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 자신에게 말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솔직히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너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거지. 꾸며낸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줄 알았어, 나쁜 새끼. 난 미치지 않았어.” 그녀는 계속 그런 말을 반복했다.
“야, 레미 헤이즐. 레베카 헤이즐! 내 눈 똑바로 봐. 내 눈 보라고.”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내 쪽으로 몸을 돌리게 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 언저리를 돌아다니다가 힘겹게 내 얼굴을 향했다. 넋이 나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넋이 똑바로 붙어있는 것 같지도 않은 눈이었다. “난 너 미쳤다고 생각 안 해. 까놓고 말하면 내가 더 미쳤을 걸.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말해줘. 널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널 도울 수 있게 날 도와줘.”
내 말에도 레미 헤이즐은 눈에 띄는 반응 없이 고요히 나를 바라볼 뿐이다. 잠들어있는 것처럼 고요한 시선. 나는 기다렸고 결국 그녀는 입을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죽었어야 해. 그런데 캐서린이 대신 죽은 거야.” 그녀의 고백은 파격적이었다. 그 말의 본뜻을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것이 생략되었으나, 필요한 모든 내용이 생략된 채로 함의되어 있었다. 그걸 파악하려는 시도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헤이즐은 내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앤드로 피터슨 교수였어.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못 찾았지. 그다음으로는 교수님이 멕시코에서 돌아가셨고. 상반신을 찾을 수 없어서 하반신만으로 장례를 치렀잖아.” 앤드루 피터슨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나 따라붙은 이야기는 나도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라진 상반신의 행방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전에 내가 해머즐리 씨 이야기하기 좀 그래했잖아. 왜 그런 줄 알아? 알렉스 해머즐리는 미쳐버렸거든. 사람이 완전히 맛이 가버렸어. 그 이후로 한동안 교수직은 공석이었는데, 결국에는 그 권유가 나한테까지 오더라. 새로운 학기에 역사학 전공과목을 가르칠 교수가 필요했는데, 그 소문 때문에 아무도 우리 학교로 오려고 안 해서.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캐서린 씨가 돌아가신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 안 해?”
“역시 너도 내 말 안 믿는구나. 우연의 일치라고? 자고 일어났는데 온 집안이 도둑맞은 것처럼 어질러져 있었어! 그것도 우연의 일치야? 그것도 우연의 일치인 거 같냐고!” 그녀는 거의 악을 쓰듯 말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나는 내 실언을 되돌려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그리하여 잠깐이지만 나를 믿어주었던 헤이즐의 마음을 배신해버렸다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며칠 전에 그런 일을 겪었어. 내가 밖에 나가 있는 사이에 누가 들어와서 뭔가를…, 이제야 앞뒤가 맞아떨어지네.”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이 저주에?”
혼자 사는 집에서 자고 일어난 사이에 완벽하게 어질러진 집. 범인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게 틀림없다. 분명 게이트 아일랜드 관련 자료겠지. 그러나 우리집 다락방과 학과 사무실에서도 범인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레미 헤이즐의 집에서는 찾았을까?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누군가 한발 앞서 자료를 빼돌렸으니까.
게이트 아일랜드와 관련된 핵심 자료를 빼돌렸다. 그리고 리스트에서 그 내역을 통채로 지워버렸다. 내부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은데, 생각하면 할수록 떠오르는 이름은 하나뿐이다.
“알렉스 해머즐리가 맛이 가버렸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게 원래 내 용건이었다. 알렉스 해머즐리에 대해 조사하는 것. 헉슬리가 ‘해머즐리의 광기와 집착’이라 표현했을 때, 나는 그것이 학자로서의 집념에 대한 단순한 은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레미 헤이즐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내가 틀린 것 같지만.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정신이 나가버렸어. 평소에도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마지막에는 정말 심각했어. 악마에 쓰이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에 쓰러져서 발작하면서도 뭐라고 막 소리를 지르는데.”
“뭐라고 했는데?”
“잘은 기억 안 나지만 동굴에서 뭘 해야 한다고 그랬던 거 같아. 닻을 내려야 한다고 했던 거 같기도 한데 확실하지는 않고. 이건 내 생각인데, 교수님과 해머즐리 씨는 공동으로 연구하던 주제가 있었어. 셰익스피어 교수님이 피터슨 교수로부터 어떤 연구 주제를 이어받았다고 했거든. 그게 문제인 거야. 거기에 투탕카멘의 저주 같은 게 있어서, 우리 탐험대에 그런 저주가 이어져 오고 있는 거라면….” 저주라는 표현을 입에 담을 때, 그녀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레미 헤이즐이 무엇이 두려워 런던을 떠나 종적을 감추고 카디프의 어머니 집에 숨어버렸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그러나 내가 말할 수 있는 사실들로는 그녀의 두려움을 달랠 길이 없다.
“그게 저주라면 오히려 잘 되었네. 내가 더 깊게 파고들면 그 저주도 다 나한테로 쏠리겠지.”
“무슨 소리야. 너 미쳤어?”
“아까 말했잖아. 미친 거로는 내가 너보다 좀 더 하다니까.”
셰익스피어와 해머즐리는 게이트 아일랜드에 대한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했었다. 그리고 범인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아마 해머즐리의 집도 뒤져보았겠지. 그런데도 레미 헤이즐의 집에 침입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명확했다. 범인은 해머즐리의 집에서도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알렉스 해머즐리는 과연 어디에 자료를 숨겨두었을까.
XVI.
사내의 성격을 두고 싹싹하다곤 말 못 하겠지만, 적어도 거짓말쟁이는 아닌 듯했다.
짐승이 달려들 때, 나는 꼼짝도 하지 못했지만 사내는 아니었다. 떨어트리듯 랜턴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칼을 잡았다. 짐승을 앞에 둔 자세가 사뭇 낯설었다. 비현실적인 일상을 수없이 가로질러온 사람처럼 몸동작 하나하나가 고요하고 엄숙하다. 사내는 다가오는 짐승을 두려워하지도, 결코 가벼이 여기지도 않았다. 야구 선수가 날아오는 공을 향해 배트를 휘두르는 것처럼, 사내는 그저 짐승을 향해 칼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 동작에도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녀석들의 시체에서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동굴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짐승은 더 자주 더 많이 기어 나왔다. 그러나 사내는 숫자와 빈도에 무관하게 거의 비슷한 속도로 짐승을 베어 넘겼다. 이상하게도 짐승들은 동굴 안쪽에서만 나왔기에, 자연스레 사내가 앞장서고 내가 그 뒤를 바싹 붙어 따라갔다.
그건 그렇고, 며칠째 오르막이다. 시간의 경과는 가늠할 수 없지만, 꽤 오랫동안 걸은 듯했다. 동굴 가장 깊은 곳에 호수가 있을 테니, 거기까지 가는 길은 내리막이어야 맞다. 하지만 경사는 낮아질 기미가 없이 계속 오르막이었다. 사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묵묵히 사내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만큼 아득히 오랜 시간을 걷고 나서야, 저 앞쪽으로 작은 불빛이 보였다. 오렌지색에 가까운 불빛. 나는 그걸 랜턴 빛이라 생각했다. 조금 더 걷고 나서야 나는 그 불빛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 빛은 인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늘이 노을 지고 있다. 출구였다.
아찔했다.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사내는 내게 사기를 친 적이 없었다. 앵커나 호수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한 적은 없었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사내를 덥석 믿어버린 내 잘못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속은 듯한 기분을 감출 수 없어서, 나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이봐 먹물쟁이, 네 궁극적인 목표가 뭐냐. 뭐하러 여기 왔냐고.” 사내가 물었다.
“…앵커를 찾아왔는데요.” 내가 답했다.
“앵커는 호수에 있지. 그런데 앵커로 가는 길은 호수의 요정만이 알고 있다며. 그럼 앵커를 찾기 위해서는 이 호수에서 누구를 찾아야겠냐.”
“…호수의 요정이요?”
“그래서 내가 그 빌어먹을 계집애한테 데려다준다는 거 아냐. 그러니까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그냥 좀 따라와라.” 사내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사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신용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물론 그것도 있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상식의 문제였다. 호수의 요정은 동굴 가장 깊은 곳에 있는데, 어째서 사내는 동굴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온 걸까?
동굴을 벗어나자마자 내 질문은 즉각 대답을 찾았다.
녹슬어가는 하늘 반대편으로 별빛이 말끔했다. 백사장이 좌우로 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말라비틀어진 나무 몇 그루가 간신히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나는 사내에 앞서서 백사장을 걸었다.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파도의 소리가 무거웠다.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해안으로 밀려들어 와,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휩쓸고 나가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동굴의 입구가 있던 그 섬, 게이트 아일랜드와는 전혀 다른 곳인 것 같았다. 별자리도 다르고 기후도 달랐다. 그러나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동굴을 관통하여 다른 곳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진즉에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 까닭을 알 수 없다고 해도 그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우주가 내 이해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나는 이해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 멀리에 조각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돛을 달지 않고 노 젓는 힘만으로 나아가는 종류의 배였다. 선체는 나무로 아주 낡았으며 노도 비슷한 꼴이었다. 그 위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니 요정이라는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이해되었다.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였다. 요정이라는 수식어가 부족할 정도로.
그녀의 아름다움은 고요했으며, 이 고요함을 지켜주기 위해 파도가 제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내 숨소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살며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녀는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어. 나는 자기만을 위한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 앵커까지의 길을 함께할 거야.”
그녀가 정말 요정인지, 아니면 요정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인지는 아직 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러나 단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녀를 신용하는 데 그 정도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