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Hamersley
[ We cast anchor lowered it into the water off a small island. ]
XVII.
알렉스 해머즐리의 사무실은 아예 다른 건물에 위치해있다. 워낙 해머즐리가 두문불출할 뿐만 아니라, 그쪽 사무실로 갈 일도 없는 탓에 별도의 사무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고 했다. 그녀는 위치를 설명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를 걱정했다. 나는 카디프에서 알게 된 사실을 헉슬리에게 전달하고 런던으로 올라왔다.
당일치기 카디프 일정이 피곤하기는 했지만,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싶을 만큼 피곤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잡고 알렉스 해머즐리의 사무실로 향했다. 여름이라 늦은 시간에도 하늘은 적당히 밝았다. 택시에서 내렸을 때, 나는 기사가 잘못된 곳에 나를 내려준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건물 외벽에 붙은 주소는 헤이즐이 알려준 그대로였다. 평범한 상업지구의 아주 평범하게 생긴 빌딩이다. 아무래도 해머즐리가 사비를 들여 마련한 공간인 듯했다. 특징 하나 없는 밋밋한 갈색 문 옆으로 붙어있는 우편함에 쓰여진 ’1702 / A. 해머즐리’라는 이름만이 내가 틀리지 않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레미 헤이즐은 셰익스피어 교수의 열쇠고리에 이쪽 사무실의 문을 여는 열쇠도 들어있다고 했다. 셀 수 없는 실패 끝에 겨우 문을 열자, 방과 화장실이 딸린 작은 가정집 같은 내부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내 자취방과도 구조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무실은 알렉스 해머즐리의 성격을 똑 닮아있었다. 필요한 것만이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은 어쩐지 휑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만 서재로 보이는 방만큼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입구 쪽 벽을 제외한 삼면이 책장으로 되어있고, 방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책상 위에도 노트와 두꺼운 서적들이 가득했다. 이곳이야말로 인간 알렉스 해머즐리의 알맹이인가 싶었다.
책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대체로 고고학 관련 서적들이었지만, 미술사학이나 철학 관련 서적도 다양하게 꽂혀 있었다. 어느 쪽이든 문외한이지만 읽어본 책도 몇 권 보였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 <선악의 저편>은 아버지가 읽으라고 시켜서 읽었는데, 억지로 읽은 거라서 기억나는 구절이 몇 개 없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였던가? 하도 오래되어 기억도 안 나네.”
만약 알렉스 해머즐리가 자료를 빼돌렸다면, 분명 이곳 어딘가에 숨겨놓았으리라. 나는 근거 없는 확신으로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다. 책장을 꼼꼼히 확인했지만 의심 가는 부분은 없다. 자연스레 나는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책과 노트 위로 쌓인 먼지의 두께가 방치된 시간의 규모를 짐작케 했다. 아무래도 해머즐리의 실종 이후로 이곳을 찾은 사람은 내가 처음인 듯했다.
노트를 하나 열어보니 일기장이었다. 단순한 사실을 열거해놓았다는 점에서 일기라기보다는 차라리 일지에 가까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뒤에서부터 몇 페이지 정도를 읽어보았다.
5월 XX일
자꾸만 동굴의 꿈을 꾼다. 실제로 본 적 없는 곳인데도 나는 거기가 어디인지 알 거 같다. 게이트 아일랜드가 틀림없다. 자고 일어나면, 어쩐지 그 섬을 찾아가야 할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인다. 충동은 쉽사리 가시지 않을뿐더러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제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5월 XX일
이제는 깨어있을 때도 동굴의 환영을 본다. 충동은 발작적으로 나를 덮쳐온다. 섬이 나를 부르고 있다. 지금까지의 내 모든 인생이 앵커를 찾아내기 위해 존재했다는 확신이 든다. 그래,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 인생이다. 나는 섬으로 갈 것이다. 반드시.
6월 XX일
셰익스피어 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 학회는 곧 있을 멕시코시티에서의 세미나에서 나를 대타로 세우려 하지만, 내게는 좀 더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그녀의 연인이었던 아르덴 베이커가 도움이 될 것이다.
학회에는 베이커 씨와 함께 멕시코로 가겠다 말해두었다. 그러나 베이커 씨 본인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혼자 멕시코로 가는 줄 알 것이다. 그사이에 나는 사라질 것이다. 조용히 준비하고 나 혼자 떠날 것이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그 섬으로.
“…으아니 이게 다 뭐람?” 알렉스 해머즐리는 나와 학회 양쪽을 한꺼번에 속이고 계획한 대로 사라져버렸다. 그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지만, 너무 놀라워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동굴의 꿈을 꾸다가 미쳐버렸다. 미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동굴을 직접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 역시 동굴의 꿈을 꾸고 있다. 최근 들어 더 자주 꾸는 거 같다. 그렇다면 나도 곧 미쳐버린 채 동굴로 향하게 되는 걸까. 소름이 돋았다.
일기장의 다른 부분도 살펴보았지만 자료를 숨겨둔 장소에 대한 언급 같은 것은 없었다. 다른 곳을 살펴보기 위해 시선을 돌리려는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밝아서 그렇지 시간으로 치면 저녁도 아니고 아주 밤이다. 텅 빈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걸음은 사무실 앞에서 멎었다. 나는 긴장으로 숨이 멎을 거 같았다.
얼굴을 본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다락방에서 서류를 훔치고 대학에서 사람을 죽였으며 레미 헤이즐의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은 바로 그 작자!
판단은 순식간이었다. 나는 도망쳐야 했다. 생각보다 이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운이 나쁘다면 저자가 먼저 자료를 차지하게 되겠지. 헉슬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애당초 내가 필요해서 자료를 찾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설령 게이트 아일랜드에 대한 자료가 세계 3차대전의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해도 우선은 내 목숨부터 살리고 볼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서재 문을 닫으려 손을 뻗은 그 순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현관 쪽 형광등이 켜지며 침입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까까머리에 뺨을 가로지르는 흉측한 흉터를 가진 사내였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거기 누구냐. 좋은 말로 할 때 나와라!” 그러나 사내는 나의 투항을 기다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솔직히 은빛 뱀이 달려들 때만큼 무서웠다. 사내의 돌진에는 그만한 박력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정신을 잃거나 하지 않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방문을 잠글 수 있었다. 닫힌 문 너머로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야 너 그 새끼 맞지? 교수년이랑 사귀었다던 글쟁이. 죽여버릴 테니까 얼른 나와!”
“아니 무슨 그런 험악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세요. 살려준대도 나갈까 말까 한데!”
“그럼 살려줄 테니까 나와! 뒤지기 싫으면 나오라고!”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내가 말했다. 나는 서재에 있는 유일한 창문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해머즐리의 사무실은 17층이다. 도망쳐보겠답시고 여기서 떨어지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내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려대었다. 주먹으로 두드리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부딪혀오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문짝이 찢어질 것 같아서, 등으로 문짝을 막고 버텨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영양실조 저체중 몸뚱이보다는 더 크고 무거운 게 필요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방 한가운데에 있던 책상을 옮겼다.
이제 사내는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대신 손도끼 같은 것으로 문을 찍어 작은 구멍을 내었다. 그 틈새로 나를 노려보는 눈매가 매섭다.
“좋아. 내가 한발 양보할게.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의 자료, 게이트 아일랜드에 대한 걸 넘겨. 그럼 그냥 곱게 떠나줄 테니까.”
“그게 어디 있는지 내가 알았으면 여기서 이 고생 안 하죠! 뭐하러 이러고 있겠어요. 얼른 찾아서 이 집 떠났……?” 나는 말하는 도중에 깨달았다. 사내의 시선이 나를 향해있지 않았다. 그는 겁에 질린듯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따라간 시선의 끝 창가에 누군가 걸터앉아있었다. 실루엣만 보고 헉슬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긴 청바지에 새카만 가죽 재킷을 걸치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바람결에 아세톤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XVIII.
조각배가 미끄러지듯 수면을 나아갔다. 나는 뱃머리에 앉아 노를 저었고, 베아트리체는 내 반대편에 앉아 고고히 미소 짓고 있다. 그 미소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워서, 나는 노을 지는 수평선 너머로 고개를 돌린 채 묵묵히 노를 저었다. 끝없이 펼쳐진 호수 위에서 바위섬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지 않은 채 이리저리 떠도는 듯 보였고, 저무는 해는 수평선을 붙잡고 좀처럼 내려가질 않았다.
수면 아래로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산호초 군락도 없었고 그 흔한 해파리 한 마리 헤엄치지 않았다. 생명이 자취를 감춘 듯한 풍경. 호수라고는 하지만 바다처럼 넓은 곳이다. 이렇게까지 텅 비어있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고개 숙여 더 깊은 곳을 바라보아도 호수 밑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구멍이라도 뚫려있는 듯이 어두컴컴했고, 심연의 깊이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궁금한 게 많을 거 같은데 무엇하나 물어보지를 않으시네요.”
“그러게요. 만나면 물어보려고 질문을 산더미처럼 쌓아놨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 뭐 하나 떠오르는 게 없네요.”
“자기는 거짓말이 능숙하지 않군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궁금한 것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았고, 산더미는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아마도 나의 모든 의문에 대하여 그녀는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 물어봐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나같이 황당무계한 이야기인지라 운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저는 죽은 걸까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감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사냥개의 꼬리에 찔려서 죽었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죠. 데커스티스 씨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던 거예요.” 데커스티스가 그 사내의 이름이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사내, 데커스티스가 내게 죽었다 살았다를 이야기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는 자기가 혼자서 짐승을 해치웠다고 했을 뿐이다. 사내가 나를 구했다고 말한 적은 있다. 그러나 사내가 구한 것은 ‘나’이지 ‘나의 목숨’이 아니었다. 데카르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생각하니까 존재한다. 지금도 이렇게 멀쩡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살아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죽은 채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럼 앵커는 뭔가요.”
“아시잖아요. 앵커는 닻이에요.” 베아트리체는 쉽게 말했다.
“말장난하자는 거 아닌데.”
“앵커는 생각보다 별거 없어요. 기능상으로는 일반적인 닻과 같죠. 자기는 혹시 닻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아나요?“
“배가 정박할 때 닻을 내리죠. 급히 배를 멈춰야 할 때도 쓰고.”
“앵커도 똑같아요. 무엇을 정박시켜놓았느냐, 단지 그 정도 차이일 뿐이죠.” 그렇다면 배 이외에 무엇을 정박시켜두었을까. 노를 저으며 생각해보았지만 좀처럼 떠오르는 게 없었다. 상당히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물어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내게 알려줄 생각이었다면 ‘무엇’ 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때문에 나는 이야기의 주제를 바꾸어 다른 것을 물었다.
“앵커가 호수 위에 있다면, 호수의 요정이 있어야 할 필요가 뭐죠? 노를 젓다 보면 언젠간 발견하게 될 텐데요.”
“자기는 아직 이상한 걸 못 느꼈나 보네요. 수면 아래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
그녀의 말에 수면 아래를 보았지만, 조금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베아트리체를 보았다.
이곳 호수에서 바위섬들의 위치는 조각배의 항로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앵커의 위치는 늘 조각배의 항로와 맞물려 돌아간다. 조각배가 움직일 때마다 섬들은 나름의 규칙으로 호수를 떠돌았고, 정해진 항로를 따르지 않으면 영원히 앵커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지난 세기의 위대한 마법사가 설치해놓은 마법적 장치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상식을 벗어난 설명이었지만, 죽은 채로 존재하는 나 역시 상식을 벗어나 있었기에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영원토록 이어지는 황혼 속에서 나는 묵묵히 노를 저었다. 우리 주변으로 바위섬 몇 개가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끝에 섬 하나가 있었다. 저곳에 앵커가 있으리라고, 나는 본능처럼 알 수 있었다. 노 젓는 팔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XIX.
정신을 차렸을 때,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누군가 큼지막한 도끼를 휘둘러 내 정수리를 박살 내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뜨뜻미지근한 무언가가 자꾸만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데, 그게 피인지 땀인지는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채로 결박당한 듯했다. 얼마나 꽉 묶어놓았는지 손발이 다 저릴 정도였다. 있는 힘껏 발버둥 쳐보았지만, 그럴수록 노끈이 살갗을 파고들어 무척 쓰라렸다. 손목 껍데기가 반쯤 벗겨졌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당장 헉슬리에게 연락해야 했다. 알려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런데 알려야 할 사실이 도대체 뭐였더라? 그 드넓은 바다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나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구고 생각했다. 머리가 아파 도무지 집중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기억해야만 했다. 기절하기 전까지의 현실과 기절하고 난 이후에 보았던 세상 전부를.
“자는 척하면 재미없어.” 여자 목소리였다. 낯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쥐고 마구 흔들어대었다. 두통과 고통이 뒤섞여 눈이 번쩍 뜨였다.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눈앞의 여자는 인상이 굉장히 날카로워 보였다. 청바지에 가죽 재킷. 창가에 걸터앉아 나를 보던 바로 그녀였다. 또한 대낮의 런던 한복판에서 나를 목 졸라 죽이려던 그 마법사이기도 했다.
“거봐, 안 자고 있었잖아. 쓸데없이 시간 끄는 거 귀찮으니까 얼른얼른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자, 게이트 아일랜드의 자료는 어디에 있지?”
뭐라뭐라 떠들어대는 소리가 내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녀 뒤편에 모로 누운 시체가 한 구 있었는데, 가슴팍과 오른쪽 옆구리에 각각 한 자루의 단검이 꽂혀있었다. 날붙이로 헤집어놓은 틈 사이로 흘러내린 피가 찐득하게 굳어있었다. 얼마나 오래 기절해있던 걸까. 가늠해보려는 찰나 그녀가 내 뺨따귀를 사정없이 올려붙였다. 순식간에 네다섯대를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좋아. 내가 질문 하나씩 한다. 신중하게 대답해.”
“몰라, 모른……!!!”
그녀는 내 왼손 약지를 감아쥐더니, 있는 힘껏 오른쪽으로 꺾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듯 아주 간단하게.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불타올랐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 숨통이 턱 막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손발이 묶인 채로는 무의미한 저항에 지나지 않았다. 눈물이 질질 새어 나왔다.
“질문 하나에 손가락 하나.”
“으으, 으으—아아아아!”
왼손 중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뼈 아작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강렬한 경련이 전신을 휩쓸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묵묵히 내 손가락을 휘둘렀다. 약지와 중지가 시체의 그것처럼 푸르딩딩하게 변했다. 그녀가 손을 떼도 통증은 계속되었다. 나는 신음을 삼켰다.
“자료.”
“진짜 몰라요. 저 진짜 모르으그긋!!” 그녀는 내가 말 끝마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왼손 검지의 차례였음에도 그녀는 오른손 엄지를 분질렀다. 준비할 수 없는 통증이 또다시 휘몰아쳤다. 고통은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었다.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비명을 질렀다. 건물에 남아있던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듣고서는 나타나서 도와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남은 일곱 손가락이 전부 으스러지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불가능한 모습으로 뒤틀려있는 열 손가락을 보며 울부짖었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다락방에 그 섬에 대한 메모 몇 개가 있었지만 제대로 읽지도 않았고, 도둑맞았어요! 그거 말고는 아는 게 없어요. 전 그냥 글쟁이라고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그 메모는 이미 확보했지. 우리는 핵심 자료를 원해.”
“……에?”
갑자기 머릿속이 고요해졌다. 사내는 방문을 부수고, 이 여자는 창문을 열었다. 막연하게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캐서린을 죽였다. 다락방의 메모 말고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아서, 리스트에 대해 경찰과 통화하기 전까지는 도둑맞은 사실조차 몰랐다. 레미 헤이즐이 잠든 사이에 집안을 뒤엎어버려 잠에서 깬 그녀가 겁에 질렸다. 여기서 도출되는 해답은 하나뿐이었다. 논리의 비약을 쓸 필요도 없다.
한 사람의 짓이 아니다. 같은 목적을 가진 서로 다른 두 인물 혹은 그 이상의 인물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게이트 아일랜드에 대한 자료를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사내는 과격했고, 여자는 은밀했을 뿐이다.
“그럼 셰익스피어 교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질문은 내가 한다.”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다리를 내려쳤다. 뼈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또다시 비명이 튀어나왔다. 단순히 주먹으로 내리친 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프다. 마비라도 된 것처럼 왼 다리가 심하게 떨렸다. 허벅지에 칼 한 자루가 박혀있었다. 혈관 몇 개를 제대로 끊어놓았는지 좁은 틈새로 피가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시야가 흐려지고 현기증이 몰려온다. 나는 내 모든 감각으로부터 배제되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려 할수록 오히려 눈은 감겨왔다. 진탕 마시고 취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기묘한 신음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게이트 아일랜드.”
“…정말 몰라요……살려주세요……왜 저한테 그러세요……정말……살려주세요….”
“그래? 모른단 말이지….” 그녀는 사내의 옆구리에 꽂혀있던 단검을 뽑았다. 찐득하게 굳은 피가 실처럼 시체와 칼 사이를 잇다 끊어졌다. 잔뜩 피를 묻혀서 칼날은 번뜩이지 않았다. 이름 모를 여자에게 죽는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어깨를 꽉 붙들고 내 눈을 바라볼 때,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살의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단검은 내 목을 향해 곧게 달렸다.
“으읏으으윽…!!”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단검과 내 목 사이에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를 달리는 단검의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실제로 영원한 것은 아니라서 이윽고 날카롭고 차가운 것의 감촉이 목젖에 닿았다. 소름 끼치는 촉감이었다. 단검이 내 목을 꿰뚫을 때,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면 단칼에 죽었던가.
“우리가 보는 게 처음은 아니지? 앗, 베이커 씨에게 한 말은 아닙니다. 저기 저 범죄자 놈한테 말한 거예요.”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사방에 먼지가 자욱했고, 내 앞에는 제임스 데릭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어깨에 소복이 내려앉은 먼지를 털었고 시선은 여전히 내가 아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여기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 뒤쪽으로 인기척이 났다. 몸까지 비틀어가며 고개를 돌리자, 알프레아 헉슬리가 창틀을 짚고 방 안으로 넘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먼지 때문에 잘못 보았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진짜 헉슬리였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여기를 알고?”
“우선 먼저 너한테 사과할 일이 있어. 나 너한테 거짓말했어.” 몸과 의자를 한 데 묶던 매듭을 풀면서 헉슬리가 말했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영 어리둥절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재가 있던 쪽 방에서는 계속하여 무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과 사람이 싸울 때 들릴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마법사는 마법사가 상대하도록 하자고.” 내가 벽 너머의 일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는지 헉슬리가 말해주었다.
“잠, 잠깐만!” 나는 나를 일으키려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일어서고 싶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당장 말해주어야 할 것이 있다. 꿈속에서 보았던 풍경. 그것이 정말 꿈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더라도 나는 말해야만 했다.
“동굴이었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동굴이 끝나고 드넓은 바다가 나왔어. 요정과 함께 배를 타고 어떤 섬으로 갔는데, 그 섬에 앵커가……, 앵커가!”
XX.
섬으로 몰려간 파도가 해안가에 부딪히면서 다시금 호수 쪽으로 밀려 나왔다. 그 이안류에 의해 조각배가 자꾸만 휘청거렸다. 노 젓는 힘으로 배를 섬에 정박시키는 것은 어려울 듯싶었다. 나는 배를 버리고 헤엄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섬까지 어떻게 갈지는 자기의 결정이에요. 그러나 저는 함께 갈 수 없어요. 행운을 빌어요.” 나는 신발과 양말을 조각배에 두고서 호수에 뛰어들었다. 물이 가벼워 헤엄치기가 한결 수월했다. 물가의 모래가 고아서 맨발로 디뎌도 아프지 않았다. 베아트리체의 말에 따르면 앵커는 이 섬 한가운데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보이는 것 중에 앵커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완만하게 펼쳐진 모래언덕 주변으로는 풀 한 포기 없었으며, 봉우리 위쪽에 바위 몇 개가 놓여 있었으나 앵커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바윗덩이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커다란 조각상을 부수고 남은 파편들 같았다. 그러나 이 파편만 가지고서 원래 조각상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찌 되었건 닻의 모습일 거 같지는 않았다. 앵커가 닻의 모습이 아니거나, 사실은 베아트리체가 내게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 하나일 거 같았다. 그녀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므로, 그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간단했다.
나는 착잡한 마음에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러나 담배는 푹 젖어있었고, 라이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해봐도 불이 붙지 않아 홧김에 라이터를 집어 던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전에 미리 피워버릴걸.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젖은 담배를 빨아보았지만, 이상한 맛 만 날 뿐이었다. 나는 담배도 던지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꼬리가 제멋대로 실룩거렸다. 이 모든 사실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앵커가 파괴되었다.
그 넓은 호수 위 메마른 웃음소리는 매아리 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