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Hamersley
[ We cast anchor lowered it into the water off a small island. ]
End of escapade.
3주간의 입원 치료 끝에 퇴원했지만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손가락뼈는 금방 붙었지만, 칼에 찔린 허벅지가 문제였다. 수술 경과가 영 신통치 않다. 아무래도 무릎과 연결된 신경 쪽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외골격 관절을 차고 있어도 걸을 때면 무릎과 허벅지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라서, 의사와 상담한 끝에 당분간은 목발을 짚고 다니기로 했다. 앞으로도 꾸준히 재활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지난한 병원 살이가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하이게이트로 가 주세요.” 나는 택시 기사에게 짧게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재활 치료가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아픈 다리 이끌고 싸돌아다녀봤자 별로 득 볼 게 없으니까. 하지만 그날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내가 직접 집으로 찾아가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리몽둥이가 고장 나버린 상태로는 멀리까지 움직이기가 너무 힘들어서,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내고야 말았다. 고맙게도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런던으로 올라와주었다.
택시는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입구에 멈춰섰다. 팁 포함 20파운드를 쥐여주자 택시기사는 내게 신의 가호까지 빌어주며 떠났다.
나는 양쪽으로 목발을 짚으며 천천히 걸었다. 게이트 아일랜드와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사이에는 GATE라는 글자 외에 어떠한 공통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들레이드 셰익스피어가 여기 묻혀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모든게 의심스러웠다. 무언가 연관되어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병원에 갇혀있는 동안 헉슬리가 병문안을 온 적이 있다. 그녀는 혼자 오지 않았고 제임스 데릭과 함께였다.
“제임스 데릭 씨. 당신 정말 변호사 맞아요?” 이게 내가 꺼낸 첫 마디였다.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그가 변호사 행세로 나를 속여먹은 거라면, 내가 봤던 셰익스피어의 유언 역시 가짜일 테니까.
“변호사입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갑을 꺼내 내게 법정 변호사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법사이기도 합니다.”
“너네 둘이 서로를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어. 심지어 그 교수 건으로 말이야.” 헉슬리가 말했다.
“비밀 유지의 의무가 있어서.” 제임스 데릭은 짧게 답했다. 그가 손을 내밀기에 나는 순순히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그럼 거짓말했다는 건 뭐야? 나한테 뭐 거짓말했다면서.”
“별 건 아니고, 처음에 널 만났을 때 내가 이상한 마력 파동을 느꼈다고 했었잖아.”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한 것도 같다. “사실 난 그런 거 못 느껴. 마법사가 아니라서. 그때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렇고 짐 데릭이 나한테 알려줬어. 그래서 찾아갈 수 있었던 거야.”
“고작 그게 끝이야? 난 또 뭐 대단한 거짓말이라고.”
“그래도 나는 양심의 가책 대 해결이다!” 헉슬리는 기지개를 켜며 밝게 웃었다. 두 사람은 한 시간 정도 머물다 떠났다. 내가 괜찮다고 몇 번을 사양했음에도 헉슬리는 끝끝내 내 앞으로 달려있는 병원비를 계산하고 떠났다. 자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이런 거라도 안 하면 미안해서 안 되겠다고.
오만가지 딴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걷다 보니, 어느새 애들린 셰익스피어의 묘역이었다. 아직은 새것처럼 반질거리는 묘비 위로 그녀의 이름이 반듯하게 새겨져 있다. 원래는 이름과 생몰년도 정도만 새겨넣기로 되어있었는데, 내가 반대해서 결국 묘비명이 추가되었다.
“신의 뜻으로 태어나 나의 뜻대로 살았다…….” 함께 살던 동안에 그녀는 이 문구가 자신의 묘비명이라고 내게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스스로가 지은 묘비명에 감탄하는 것은 덤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훌륭한 묘비명이 아닐 수 없다. 쉰 조금 안 되는 그녀의 인생을 단 한 줄만으로 멋지게 풀어냈으니.
“여자랑 약속 잡는데 공동묘지는 좀 그렇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자 레미 헤이즐의 모습이 보였다. 투정 섞인 말투였지만 그마저도 반갑다.
“장례식 이후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서.” 어쩌면 애들린이 나의 런던 살이를 조건으로 정한 까닭이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있으면 찾아오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이렇게라도 자신의 묘소를 자주 찾아달라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저녁은?” 내가 물었다.
“아직 안 먹었는데.”
“다행이네. 이 근처에 로스트 치킨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같이 저녁이나 먹자.“
“…설마 밥이나 먹자고 카디프에서 여기까지 날 부른 건 아니지?”
“글쎄올씨다.” 나는 씩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다리가 불편하여 나는 천천히 걸었다. 고맙게도 레미 헤이즐은 옆에서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내 걸음에 맞춰주었다. 다행히 식당이 정말 가까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딱 저녁 식사 시간에 걸쳐서 가게는 사람으로 붐볐다. 그래도 자리가 넉넉하여 우리 두 사람 앉을 정도는 충분하다. 그녀는 로스트 치킨과 함께 마실 테넌츠를 시켰고, 나는 맥주 대신 스프라이트를 주문했다.
“별 일이네. 천하의 아르덴 베이커가 술을 다 마다하고.” 레미 헤이즐이 말했다.
“다리 때문에 지금 항생제 먹고 있거든. 그래서 당분간은 쭉 못 마셔. 강제로 금주하려니 아주 죽겠다 야.” 나는 옆에 세워둔 목발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쩌다 그렇게 다친 건데.” 그녀는 질문 속에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술 먹고 자빠졌어. 쌤통이지 뭐.” 그래서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헤이즐이 겨우 벗어난 그 ‘저주’에 다시 매몰되어 버릴까 봐. 다행히 레미 헤이즐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음식보다 음료가 먼저 나왔다.
“계속 카디프에 있을 거야?”
“글쎄. 학교로 돌아간다 해도 다음 학기쯤이겠지. 새로운 교수를 구한 모양이니 굳이 내가 돌아갈 이유도 없겠지만.”
“백수로 사는 것도 기껏 해봐야 한두 달이지. 나 봐. 삼 년째 백수잖아. 이젠 노는 게 지루할 정도라니까.”
“고작 그런 이야기 하려고 나를 부른 거였어?” 그렇게 말하면서 헤이즐은 웃었다. 웃어서 더 무섭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다는, 각오를 끝마친 사람의 표정. 나는 콜라 한 모금하고 말을 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탐사대와 관련된 일련의 죽음에 연관성은 없어. 모든 죽음이 개별적인 죽음이었단 소리야.”
셰익스피어 교수가 속했던 탐사대에 찾아온 불우한 죽음에 대해 레미 헤이즐은 ‘저주’라 했다. 그 표현은 이러한 일련의 죽음이 과연 우연일 수 있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그리고 잘 훈련된 학자답게 레미 헤이즐은 우연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연이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고, 누군가는 특별히 더 불우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야기. 그러나 고작 그뿐인 것을 설명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상식 밖의 개념을 떠들어야 할 테니까.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설명해보기로 했다. 가까운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적어도 레미 헤이즐 만큼은 알 권리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애들린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으니까. 개인적으로는 뱀에 물려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확신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은 없네.”
“뱀에 물려 돌아가셨다고? 너도 봤잖아. 교수님 시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래서 자신 없다고 했잖아. 다만, 그 뱀이 보통 뱀은 아니었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데도 몸집이 재빨라서 나도 죽을 뻔했다고.“
“그게 무슨……?”
“네 방에 몰래 들어와 난장판을 만들어놓은 범인도 누구인지 알아. 그 남자가 캐서린도 죽였어. 얼굴에 뺨을 가로지르는 흉측한 흉터가 있었지. 근데 이미 죽었어. 고문 좋아하는 어떤 여자가 칼 두 개로 찔러 죽였더라고. 찌르는 걸 보진 못했지만 아마 그 여자가 죽인 게 맞을 거야.” 모든 죽음이 어떠한 연관도 없이 각자의 죽음이었던 것처럼, 게이트 아일랜드와 관련된 범죄도 결국 제각각의 범죄였다. 왜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한쪽은 난장판에 한쪽은 언제 도둑맞았는지 모를 정도로 깔끔했었는데.
“그리고 알렉스 해머즐리도 죽었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직접 보기라도 했어?” 헤이즐이 말했다.
“봤다면 본 거고, 못 봤다면 아닌 거고.” 꿈속에서 보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섬에서 이상한 괴물에게 습격을 당했어. 옆구리를 찔렸는데, 피가 너무 많이 나왔어. 그래도 목표한 바를 이루었으니 자기 이름으로 된 무덤이 없다고 해서 크게 억울해하진 않을 거야.”
알렉스 해머즐리는 동굴의 꿈을 꾸다가 미쳐버렸다. 미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동굴을 직접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에는 나도 동굴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 꿈을 꾸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었던 까닭에, 나는 미쳐버린 채 동굴로 향하게 될 것을 걱정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꿈속의 나는, 아니, 애당초 그것을 꿈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말 꿈이었을까.
노을 지는 바다 위에서 수면 아래를 유심히 살피고 있을 때, 수면에 비친 얼굴은 내가 아니었다. 몹시 고단한 듯 눈이 반쯤 감겨있었지만, 그게 알렉스 해머즐리의 얼굴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깨어나자마자 고문당해서, 그 사실을 며칠간 잊고 살았다. 샤워하다가 문득 기억해내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모른 채 살고 있었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이걸 알아내는 동안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어. 술 마시다 발을 헛디디지만 많았어도 더 좋았을 텐데.” 이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레미 헤이즐이 저주라는 망상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그녀가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야. 나를 미친놈 취급해도 할 수 없어. 그리고 내가 설마 거짓말하려고 널 여기까지 불러냈을까봐?”
때마침 종업원이 로스트 치킨을 가져왔다. 그러나 레미 헤이즐은 손도 대지 않았다. 내가 떠벌린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내 말을 믿어준다면 그 이상 좋을 수가 없다. 하지만 믿어주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제 믿고 안 믿고는 그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