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er Hamersley
[ We cast anchor lowered it into the water off a small island. ]
Null.
“태초에 종말이 있었다. 종말은 그 무엇보다 앞서 존재했으나, 모든 것의 마지막에 등장하리니.”
- 피에르 뒤프레
I.
JR 시부야 역을 나서자 그 유명한 교차로가 바로 앞이었다. 10월 초인데도 날이 더워서 사람들은 모두 반바지에 반팔이었고, 헉슬리도 비슷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클러치백을 들어 햇빛을 가리고 주변을 살폈다. 관광객 몇 명이 강아지 동상을 찾아 분주했지만, 그녀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가능하면 평생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거리의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헉슬리는 도로를 가로질렀다.
역을 마주 보고 서 있는 빌딩의 2층에 스타벅스가 있다. 그곳이 약속 장소였다. 서점과 입구를 공유하고 있는 탓에 조금 해맸지만, 어렵지 않게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스크램블 교차로를 바로 앞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라 실내는 하루 종일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헉슬리는 시장통 같은 인파를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좌석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히이라기 리노카는 긴 생머리를 한데 묶고, 하늘하늘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웃는 낯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짜증이 치밀었다. 역시 맨정신으로는 안 될 거 같아서, 헉슬리는 클러치백에서 작은 위스키병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알콜은 빠르게 온몸으로 퍼졌다. 빈 병을 쓰레기통에 던져넣고서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잘 지냈어?” 리노카가 말했다.
“우리가 그런 신변잡기 나눌 사이는 아닐 텐데. 오래 있고 싶은 생각 없으니 짧게 끝내.” 헉슬리가 말했다.
“노력해볼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리노카는 이야기를 짧게 끝낼 자신이 없었다.
게이트 아일랜드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섬이 아니다. 대마법사가 섬을 만들고, 사냥꾼이 손님을 풀어놓았으며, 뒤프레 가문이 동굴 깊숙한 곳에 앵커를 봉인했다. 그들이 죽고 난 이후에 게이트 아일랜드는 히이라기 리노카의 소관이었다. 세상이 섬의 존재를 알지 못하도록 숨겨야 했으며, 찾아오는 자들의 기억을 조작해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알렉스 해머즐리만큼은 논외였다.
“나는 그가 필요했어. 아르덴 베이커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데 해머즐리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거든.”
“글쟁이가 동굴과 앵커의 꿈을 꾼 것도 너 때문이었냐?”
“맞아, 내가 그런 거야. 그 고고학자 양반이 처한 상황을 꿈의 형태로 전송했달까. 처음 해보는 거여서 제대로 돌아갈지는 미지수였지만, 네가 나를 찾아온 거 보면 괜찮았나 보네.”
“왜 하필 글쟁이였던 건데. 그 꿈 때문에 걔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니가 알기나 해?” 헉슬리의 말과는 달리 실제로 글쟁이 아르덴 베이커가 받은 고통의 대부분은 그 본인이 자초한 것이었으나, 그걸 알 길이 없는 리노카로서는 미안한 감정이 앞섰다.
“그치만 너한테 직접 연락할 길이 없었는걸. 내 전화번호는 보나 마나 차단되어 있을 테고, 정신을 닫아놓고 있으니 네 머릿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도 없고 말이야.”
“그럼 연락을 안 하면 그만이지, 뭐하러 일반인까지 끌어들이고 지랄이야.”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중요는 개뿔이 중요해. 고작 그따위 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헉슬리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히이라기 리노카는 그걸 비꼬는 거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고작이라니. 너 앵커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래?”
“중요하지. 암 중요하고말고. 앵커가 파괴되었으니 장벽도 제구실을 못하게 될 거야? 하지만 그게 너랑 내가 한 테이블에 마주 앉을 만큼 중요한 사안은 아니잖아 이 ㅆ….” 헉슬리는 욕지거리를 속으로 삼켰다. 만약 여기서 못 참고 버럭 화를 내버린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고, 장소가 주는 이점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장소를 고르라고 가르친 건 그녀의 아버지였다. 거기에는 아주 명백한 이유가 있었다. 사람이 모여있을 때는 반드시 그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무언가가 있으니까. 엿듣고자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금방 티가 날 뿐만 아니라, 모여있는 사람으로 시끄러워 쉽게 엿들을 수조차 없다.
“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리노카가 입을 열었다. “앵커는 장벽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냐.”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앵커가 장벽을 유지하는 게 아니야. 그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안 그러면 왜 굳이 ‘닻Anchor’이라고 부르겠어. 뭐 벽돌이나 대충 그런 식으로 불렀겠지.”
“…하지만 장벽이!”
“맞아. 장벽도 무너지고 앵커도 파괴되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그 둘이 연관되어있는 건 아니라니까? 각각의 문제는 개별적인 것이라고.”
“그럴 리 없어. 그럴리가…. 그럼 앵커는 뭘 위해 만들어진 건데?” 헉슬리가 물었다.
태초에 종말이 있었다. 그것은 차원과 차원을 넘나들면서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지나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종말이었다.
그리고 중세의 끝 무렵에, 종말은 어떠한 징후도 없이 갑작스럽게 도래했다. 거대한 촉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마다 세상은 부패하고 타락했다. 위대한 윙라뭄드마저도 종말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그는 강력한 소멸 마법으로 종말을 찢어버리는 데 성공하지만, 찢어진 세 조각의 사체로부터 더욱 섬뜩한 것이 태어날 뿐이었다.
운명의 침략자 엔가돗Engadot the Invader of fate, 종말의 집행자 녹시아Noxya the Executor of apocalypse, 이성의 도살자 도리스Doris the Butcher of reason는 각각이 종말 만큼이나 위협적인 존재였다. 위대한 윙라뭄드가 마지막 숨을 다해 이들을 물질세계로부터 추방하였지만,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앵커를 만든 거야. 섬뜩한 것들을 영원히 봉인하기 위해서. 그들을 한데 묶어놓고 닻을 내려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도록.”
“…….”
“물론 그사이에 여러 일들이 있기는 했는데 지금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니. 이제 앵커가 부서졌고 섬뜩한 것들이 풀려났어.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종말을 상대로 게이트워치GateWatch는 언제나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해.” 리노카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조금 전과 비교해 언성이 높아져 있었다.
“그게 뭔데.”
“어떤 거, 게이트워치? 말 그대로 관문의 감시자들이야. 처음에는 ‘관문섬의 파수꾼the Watcher in the Gate Island’이라고 했는데 뭔가 이름이 너무 긴 거 같더라고.”
“본론.” 헉슬리는 짧게 말했다.
“게이트워치의 최우선 목표는 섬뜩한 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데 있지만, 다양한 차선책도 궁리하고 있어.” 말하면서, 리노카는 건너편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자리를 등지고 앉아 사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꾸로 쓴 양키스 모자와 의자에 걸어놓은 가방만으로도 충분하다. 때 묻은 노란 백팩의 좌우로 두 자루 칼이 안테나처럼 걸려있었다. 제이드 데커스티스, 미데녹의 구원자로 더 잘 알려진 사내였다. 그 옆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는 은발 투블럭의 여자는 누구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 세 사람의 조합으로 미루어볼 때,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임은 분명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옆에서 손을 흔드는 꼬맹이가…….
“블링크 더프? 저게 뭐하는 조합인데.”
“그렇게 말하지 마. 내가 모을 수 있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야. 그렇지만 네가 우리를 도와준다면 더 좋겠지? 너랑 라셀 뒤프레, 그리고 월리엄 브레이커 주니어만 있으면 딱인데.”
“내가 왜 이 미치광이 광대극에 어울려 줘야 하는 건데. 애당초 종말의 세 자매는 동화 속 이야기야. 그걸 가지고 뭘 대비하네 마네 해. 미친년인 줄은 알았지만……. 왜, 신데렐라나 헤르메스의 도끼에는 대비 안 하게?”
“관문섬과 앵커는 아버지 필생의 역작이야. 우리는 그걸 지켜야 할 의무가─”
“─개소리하지 마! 아가리 찢어버리고 싶어지니까.” 그녀는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쏟아졌지만, 헉슬리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가 보건 말건 상관없었다. 대화는 끝났다. “넌 아버지를 기억할 자격도 없어.” 그 말을 끝으로 헉슬리는 떠나버렸다. 리노카가 붙잡을 새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혼자 테이블 차지하고 있기 뭐해서, 리노카는 일행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틀린 거 같아.” 리노카가 말했다.
“제가 뭐라고 했어요, 선생님. 알프레아 헉슬리는 절대 우리 안 도와줄 거라니까요?” 블링크 더프가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종말의 세 자매를 단지 동화 속 이야기로만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
“그런 걸 어떻게 믿겠냐. 씨바 나도 안 믿는데.” 제이드 데커스티스가 말했다.
“안 믿었어? 그럼 여긴 왜 따라온 거야.” 리노카가 말했다.
“니가 끌고왔잖아, 억지로!” 말하면서, 제이드는 자신이 쓰고있는 뉴욕 양키스 모자를 가리켰다.
“아 맞다. 내가 저녁 사준다고 해놓고 그냥 끌고온 거였지.”
“뭐 이런 정신머리를 아웃소싱하고 다니는 년이 다 있지…….”
“그럼 그렇게 하자. 관문섬에서 고생한 것도 있으니까 저녁은 내가 사는 거로. 마침 이 근처에 질 좋은 와규를 내는 가게가 있거든. 거기서 저녁 먹으면서 겸사겸사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보자고. 루시는 고기 괜찮아?”
“저는 괜찮습니다. 물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아 헬워커Lucia Hellwalker가 말했다. 대답의 끄트머리에, 제이드가 혼잣말처럼 ‘감사는 개뿔…’이라고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