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ll.
최악의 상황에서 문은 열린다.
I.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고개 내밀어 밖을 살펴보니 무슨 일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옆 건물의 술집에서 싸움이라도 났는지 인파가 건물 밖까지 몰려있다. 예로부터 구경 중 으뜸은 싸움 구경이라 했다. 그러나 블링크 더프Blink Duff는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걸 어쩐담…….”
식탁에는 오븐에서 갓 꺼내온 라자냐가 놓여 있었다. 열세 살 꼬꼬마가 혼자 밥 먹는 게 불쌍하다고 주인아저씨가 고기 듬뿍 치즈 듬뿍 넣고 만들어주신, 메뉴에도 없는 특제품. 냄새만 맡아보아도 맛있으리란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건 식어도 맛있지만, 가능하다면 식기 전에 먹어 치우는 편이 훨씬 좋다. 더군다나 허기진 배가 숟갈을 쥐고 놓지 않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어떤 상황이기에 저리도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걸까. 블링크 더프는 고민했지만 답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싸움은 언젠가 끝나겠지만, 라자냐는 도망가지 않는다. 마음을 굳힌 그는 크게 한 숟갈 입에 욱여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잠깐 다녀오는 정도라면 괜찮을 거 같았다.
잔뜩 우물거리면서 생각했다. 라자냐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치즈가 식어서 딱딱해지기 전에 돌아가고 싶다. 단순히 싸움 구경뿐이라면 몇 분 안 되어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예감이 불길했다. 제때 맞춰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잠깐 사이에 사람이 더 몰려든 듯했다. 인파의 가장자리에서는 술집 안쪽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계속 머무르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그는 사람 사이를 헤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밀도가 상당했으나 블링크에게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몇 차례 허우적거린 끝에 맨 앞자리까지 갈 수 있었다.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기이했다.
남녀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남자가 먼저 추파를 던지고, 여자가 거부한 듯 보였다. 벌써 몇 대 맞았는지 남자 쪽 몰골이 볼만했다. 이게 전부였다면 상황은 기이할 것 하나 없이 단순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 블링크에게는 몹시 기이했다.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이대로 두면 여자가 겁탈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칠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는 이 없었다. 여자를 동정하는 눈빛은 있었지만, 눈빛은 동정으로 끝이었다. 무슨 보이지 않는 벽으로 가로막히기라도 한 듯 다들 제자리에서 가만 지켜볼 뿐이다. 기다려도 나서는 이 없을 것 같아 그는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게 블링크 더프는 스스로를 군중과 구별 지었다.
“그 정도에서 그만두세요. 저 누나가 싫어하잖아요.”
난데없는 꼬꼬마의 등장에 제이드 데커스티스Jade Decustis는 어리둥절했다.
“뭐냐, 넌.”
“지나가는 용감한 어린이인데요. 적어도 여기 모여 있는 어른들보다는 더 용감한. 이름은 케이런 더프Keiren Duff인데 친구들은 보통 블링크라고 불러요.”
“그런 걸 물어본 게……. 됐고, 꼬마야, 다치기 싫으면 꺼져라. 오늘 나는 기분이 몹시 좆같거든.”
“선생님이 그랬는데 함부로 욕하는 사람은 나쁜 거래요. 그리고 나쁜 사람을 보고도 참는 건 더 나쁜 사람이라 그랬어요.”
“함부로 까불다 맞아 뒈지면 너만 손해라고 그 선생님이 안 가르쳐주시던?”
“처음 듣는데요. 선생님은 나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벌을 받게 된다고 가르쳐주셨어요. 아무도 벌을 주지 않으면 제가 나서서 벌을 줘야 한다고 당부하셨고요. 그러니까….” 그는 보다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제가 벌을 줄게요. 달게 받으세요.”
그 말에 제이드 데커스티스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꼬맹이가 무슨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되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들은 그대로의 내용을 꼬맹이는 지껄인 것이다. 그 사실이 제이드로 하여금 몹시 열 받게 했다. 말 섞는 것조차 끔찍하다며 짜증 내던 계집애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분노가 이성을 뒤집어버렸다. 그는 테이블 뒤쪽에 세워둔 칼을 집어 들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뼈다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벌을 주겠다고? 어른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글러 먹었구나. 너 오늘 잘 걸렸다. 내가 버릇을 고쳐주지.”
제이드는 생각했다. 단순히 화풀이할 데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웠다. 산 너머 마을로 물건을 옮기는 와중에 하필이면 모레노 패거리와 마주치고 말았다. 칼을 휘두르며 끝까지 저항했지만 머릿수가 맞지 않았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혼자서 여섯 명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한 놈은 총까지 들고 있었으니까. 결국, 물건도 뺏기고 흠씬 두들겨 맞기까지 했다. 패거리가 떠나간 후에도 그는 산길 흙바닥에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하늘이 무척 맑았다. 하지만 빗줄기가 뺨과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제이드는 흐르는 빗줄기를 닦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을로 내려갔다.
벌써 연락이 오갔는지 집 앞에 대장이 와 있었다. 물건의 행방을 묻기에 사실대로 대답해주었다. 대장은 물건을 찾아오던가, 아니면 물건값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는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선택하지 않는 제이드를 향해 대장은 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 모든 폭력을 묵묵히 감당했다. 대장은 집안을 뒤져서 돈 몇 푼을 챙겨갔다. 거실 바닥에 숨겨둔 비상금은 무사했다. 제이드는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낮잠이 길어져 해가 저물었다. 배가 몹시 고팠다.
제이드는 약간의 돈을 챙겨 술집으로 향했다. 맥주 하나와 요깃거리를 시켜놓고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예쁘장한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허리가 잘록하고 엉덩이가 탐스러웠다.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저런 여자들은 돈 많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니까. 그래도 말이나 한번 걸어보고 싶었다. 이렇게 대놓고 짜증 낼 줄은 몰랐지만.
마치 불결한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역겨워서 말도 섞기 싫다고 여자는 말했다. 제이드는 손을 들어 냅다 뺨을 갈겼다. 그리곤 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테이블 쪽으로 끌고 왔다.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끈덕지게 버텼다. 그러나 남자의 완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제이드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단순히 화풀이할 데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고작 그 정도의 일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갓 중학생이 되었을 법한 어린애한테 칼을 들이밀고 있다. 스스로가 너무나도 졸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칼을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자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문제다. 제이드는 차라리 꼬마가 도망쳐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꼬마는 오히려 기세등등했다. 제이드는 당혹스러웠다.
당혹스럽기는 블링크 더프도 마찬가지였다. 테이블 뒤쪽은 잘 보이지 않았기에 칼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칼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지 까불지는 않았을 텐데.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스스로 군중과 구별 지었는데, 결국 혼자만 바보였던 셈이다.
이래나 저래나 기본에 충실한 검이었다. 투박하나 군더더기가 없었다. 균형이 잘 잡혀있어 휘두르기 좋아 보였다. 도신에 음각으로 Harmony라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그게 칼 이름이지 싶었다. 대장장이는 칼이 세상의 조화를 위해 헌신하길 바랐을 테지만, 현실은 그 의도에 정확히 반대되고 있다. 세상의 조화를 마구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이러니하다.
“자,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블링크 더프가 중얼거렸다.
인질로 잡혀있던 여자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더는 거짓부렁으로 상대를 도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블링크는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고 싶었다. 평범한 시민이 저런 흉기를 들고 다닐 리 없었다. 심지어 저 남자는 숙련되어있었다. 짧은 휘두름에도 깊이가 있었다. 다만,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블링크는 가늠할 수 없었다.
저자는 우리 쪽 사람일까? 블링크는 그 점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험해보기에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장소를 옮길 필요가 있었다. 물론 밖에 나가서 싸우자고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뻔했다. 그러니 계속 도발해서 어떤 식으로든 공격을 끌어내야만 했다.
“너무 겉멋 부리는 거 아녜요? 어차피 휘두르지도 않을 건데.”
“내가 안 휘두를 것 같아?”
“사람들 앞이라고 센 척하는 건 이해하는데, 방식이 너무 구식이네요. 안 휘두를 거 같냐고요? 못 휘두르는 거겠죠. 콩밥 먹기 싫으면 가만히 계셔야지. 뭐, 좆같으면 한 대 쳐보시던가.”
그 말을 듣고도 참으면 제이드 데커스티스가 아니었다. 오냐, 본때를 보여주마. 그는 있는 힘껏 칼을 휘둘렀다. 목표가 명확해서 칼은 곧게 달렸다. 술집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요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들에게는 블링크의 목이 달아나는 게 기정사실인 듯했다. 그러나 정작 제이드는 꼬마의 목을 벨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화가 치밀었대도 일말의 이성은 남아있었다. 있는 힘껏 휘둘렀지만, 칼날은 바닥을 향해있다. 도신의 넓은 부분으로 마치 귀싸대기 후리듯이 때려줄 생각이었다.
그야 풀스윙으로 휘둘렀으니 가볍게 끝나지는 않을 터였다. 고막이 터지거나 턱뼈가 나가거나. 어느 쪽이든 깽값 물어주게 생겼다. 대장이 거실 바닥의 비상금을 건드리지 않은 건 이걸 위한 복선이었나. 제이드는 쓰게 웃었다.
다음 순간에, 뺨과 칼이 부딪쳐 블링크 더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충격은 상당했다. 블링크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뺨이 금세 부어올랐다. 입 안쪽이 찢어졌는지 피 맛이 짙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사람들은 크게 동요했다. 블링크의 구사일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럴 만한 상황이긴 했다.
제이드 데커스티스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니까.
II.
밤중에 숲속은 어두워서 앞길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나 잎 넓은 나무가 빼곡해 달빛은 지면을 비추지 못했다. 눈을 뜨나 감으나 매한가지였다. 제이드는 허공에 칼을 겨누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서 기척은 분명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멀다고도 할 수 없었다. 산짐승일까? 그의 실력이라면 웬만한 산짐승 정도는 그럭저럭 상대할 만했다. 그러나 멧돼지나 불곰같이 덩치 큰 짐승이라면 도망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기척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윤곽이 드러났다. 크기가 작았으나 산짐승은 아니었다. 인간의 형체, 어린애의 모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제이드는 윤곽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칼을 거두지 않았다. 그 어떤 의미에서도 꼬마는 산짐승보다 위험한 존재였다.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술집에서 뺨을 후릴 때, 칼자루를 통해 전해지는 손맛이 끝내줬다. 분명 따귀가 제대로 들어간 것이었다. 본때를 보여주었다는 생각에 제이드는 득의양양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당황할 틈도 없이 고통은 찾아왔다. 산채로 위장이 버무려지는 듯한 기분에 역겨웠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속을 게워냈다. 온종일 먹은 게 없어서 토사물은 위액으로 시큼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칼을 짚고 일어나야 했다. 주변을 살피려 해도 사방이 어두워 보이는 게 없었다. 그래도 여기가 술집이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기억을 곱씹어보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술집에서 숲속으로 이동하게 된 경위가 모호하긴 했다. 그러나 기절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싶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숲은 점점 추워져서, 제이드는 끝없이 물고 늘어지는 생각을 잠시 접기로 했다. 우선 이 숲을 빠져나가야 한다. 민가를 찾으면 여기가 어딘지도 명확해지리라. 그런 생각에 숲을 헤매던 도중 블링크 더프와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전후 사정이 명확하지 않은 까닭에 이러한 조우가 우연인지 아닌지 제이드는 판단할 수 없었다.
“너, 도대체 뭐냐.”
“아까도 말했지만 용감하고 정의로운 어린이라니까요.”
“개소리 집어치워! 정체가 뭐야. 내게 무슨 짓을 했냐고!”
제이드의 반응은 블링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격렬했다.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블링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우리 쪽 사람은 아니었네요. 아까워라.”
그렇다면 괜한 짓 한 셈이 되고 만다. 그 점이 블링크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블링크는 클라우디오스 선서에 묶여있었다. 그런 만큼 남들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초능력과 마법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상식 외의 세계에 대해 꼭꼭 숨겨야 할 의무가 블링크에게는 있었다. 제이드의 공격을 끌어내야 했던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한 대 맞아야만 했다. 단순한 신체 접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전심전력을 다 해 휘두르는 주먹질 혹은 칼질. 그 정도가 딱 적당했다.
물론 블링크는 그 나이 또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고작 털끝 하나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원하는 위치에다 옮겨놓을 수 있었으니까. 또래뿐 아니라 초능력자 전체를 뒤져봐도 이 정도 능력은 흔치 않다. 뺨을 맞기 전에 제이드를 보내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 블링크 더프는 애당초 두 마리 토끼를 노리고 있었다. 첫 번째 토끼는 타의적인 신체접촉, 두 번째 토끼는 피해자 행세. 오로지 과도한 폭력만이 이 두 마리 토끼를 가능하게 했다.
덕분에 제이드가 감쪽같이 사라졌음에도 누구 하나 블링크를 의심하지 않았다. 초현실적인 상황과 폭력에 짓밟힌 피해자를 결부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그는 유유히 술집을 빠져나왔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늘 옳았다.
“어서 대답하라고!”
제이드는 부르짖었다. 칼끝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고 블링크는 잠깐 고민했다.
“별거 아녜요. 이런 식으로 했는데…”
그는 바닥에서 적당한 크기의 돌을 주워들었다. 그리곤 있는 힘껏 집어던졌다. 제이드에게도 그 모습은 보였다. 시늉이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던졌음을 알았다. 하지만 떨어지는 게 없었다. 마치 날아오는 도중에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본적으로는 순간이동 같은 거예요. 위치 좌표를 제 임의로 수정하는 거랄까. 신기하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제이드는 말을 아꼈다.
“원래는 이런 거 알려주면 안 되는 건데, 괜찮겠죠? 어차피 마을로 돌아가 봤자 아무도 아저씨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요. 아마 사실대로 털어놓아도 미친놈 취급을 받을 거예요. 하지만 직접 경험한 당사자는 절대로 잊지 못해요. 한 번이라도 상식 외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 되돌릴 수가 없죠.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겸사겸사 제가 드리는 벌이고요. 앞으로는 착한 사람들 괴롭히지 마세요.”
그 말을 끝으로 블링크는 마을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튀어나온 제이드의 말 한마디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뭔 미친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만, 너 이 새끼 사람 아니지?”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살랑거리는 틈을 타 달빛이 그를 비추었다. 제이드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입꼬리가 씰룩 올라가 있는 데다가 두 눈에 광기가 어른거렸다. 그 광기의 까닭을 블링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긴 설명이 헛수고였다는 사실에 그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칼날은 곧장 목을 겨누고 날아왔다. 그러나 블링크는 피하지 않았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었다. 목에 닿는 순간을 노려 그는 칼의 위치를 조절했다. 타이밍이 살짝 어긋나 목에 작은 생채기가 났지만 그것뿐이었다. 갑자기 두 손이 가벼워진 탓에 제이드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러나 이내 중심을 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리 그래도 주먹을 없애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 좌표를 조절하며 주먹을 피했다. 덕분에 제이드는 자꾸만 헛방질이었다. 때리는 사람은 있는데 맞는 사람이 없어서 공방은 무료했다.
“제발 좀 뒤져라 이 괴물 새끼야!”
그 잔혹한 외침에 블링크 더프는 피해 다니는 것을 관두었다. 제이드의 주먹이 블링크의 얼굴에 제대로 꽂혔다. 얼굴이 홱 돌아가 버릴 정도로 강력한 한 방이었다. 그러나 정작 비명을 지르며 자빠진 쪽은 제이드였다. 그는 어깨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아저씨는 말을 예쁘게 하려고 노력 좀 해봐요. 그렇게 심한 말로 다른 사람 마음에 상처 내면 기분 좋아요? 진짜 나빴어. 어깨뼈를 산산조각냈으니 한동안 어디 가서 함부로 주먹질 못 할 거예요. 몸조리 잘하면 금방 나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라자냐 먹으러 가봐야 해서 저는 이만 실례할게요.” 조곤조곤한 말투였음에도 블링크의 표정은 매서웠다.
그가 떠나고, 제이드는 산길 흙바닥에 칼도 없이 홀로 남겨졌다. 보는 눈 하나 없어서 그는 원 없이 울부짖었다. 애들처럼 가식 없이 엉엉 울었다.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웠다. 맞고 맞고 계속 맞았다. 그 끝에 괴물 같은 꼬마를 만나 형의 유품도 잃어버리고 어깨뼈도 결딴나버렸다. 부서진 어깨를 부여잡고 그는 신음했다.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이 미웠다. 분하고 서러워서 울음은 쉬이 그쳐지지 않았다.
상식 외의 세계에 접점을 둔 인간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다고 꼬마는 말했다. 오히려 잘 됐다. 바라던 바였다. 어차피 밑바닥 인생이다. 온갖 초능력을 배워서 세상에 복수하겠노라고 그는 울면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