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one Day.
[ He works to forget his painful life. ]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 직장인들이 한창 점심을 먹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카나엘 디아즈의 하루는 시작된다. 빠르게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빵과 우유로 간단히 식사한다. 샤워는 늘 차가운 물로 하는데, 따듯한 물로 씻으면 좀체 잠기운이 가시질 않기 때문이다. 잠옷과 속옷을 빨래바구니에 던져 넣고 출근 준비를 한다. 출근 준비라고 했지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집안을 조금 정리한 뒤 적당한 외출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딴 길로 새지 않으면 직장까지는 걸어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카나엘 디아즈의 출근은 언제나 한 시간을 넘긴다. 매일같이 들르는 꽃집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꽃집의 아가씨는 능란하게 튤립 두 송이를 가져와 다듬어준다. 하얗고 붉은 튤립이다. 값을 지불한 뒤 카나엘은 좀 떨어진 바닷가로 향한다. 다스레 해안가라고 불리는 곳이다. 여동생을 장사지낸 곳은 여기 해안가에서 떨어진 곳으로, 배를 타고도 한참을 나가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 그곳으로 가고 싶지만, 일상에 붙잡혀 있는 몸이다. 카나엘은 바다 위로 튤립 두 송이를 띄운다. 파도가 튤립을 여동생에게로 전해주기를. 그 후에야 카나엘은 직장으로 향한다.
카나엘 디아즈는 펍 로열 블루스에서 매니저로 일한다. 영업 시작은 오후 다섯 시부터지만, 그는 늘 14시 30분까지 출근한다. 펍의 매니저로서 영업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은 시작될 주말을 준비하는 금요일이다. 일요일까지의 식자재와 주류가 들어오는 날이기 때문에, 절대 늦어서는 안 되는 날이기도 하다. 카나엘은 가게 안쪽에 위치한 직원용 휴게실에서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도중에 아르바이트 직원 두 명이 출근한다. 두 명 모두 홀서빙 및 계산 담당이다. 그러나 매일 출근하는 것은 서지율이라는 한국인 남학생뿐이고, 에밀리아 혼스라는 독일 아가씨는 금∙토∙일에만 출근한다. 에밀리가 유니폼으로 갈아입을 때 카나엘과 서지율은 가게 밖에서 노닥거린다.
식자재 업자는 세 시 전에 가게 앞으로 도착한다. 냉동장치가 달린 커다란 트럭을 몰고 온다. 카나엘은 아르바이트 직원들과 함께 식자재를 옮긴다. 가게에 딸린 작은 창고 안으로 가져와 깔끔하게 쌓아놓는다. 식자재를 다 옮기기도 전에 주류 업자가 찾아온다. 카나엘은 식자재 업자가 내민 영수증에 서명하고 아르바이트 직원들에게 서두르라고 요구한다.
로열 블루스의 단골손님들은 안주 없이 마시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한 까닭에 들여오는 주류의 양이 식자재에 비해 월등히 많다. 트럭 하나 가득이다. 주류업자 쪽의 영수증에도 서명해주고 함께 술을 옮긴다. 궤짝 채로 술을 쌓아놓는 창고에는 수요일에 받았던 술이 아직 몇 남아있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 해가 밝기도 전에 모두 마셔 없어질 것을 카나엘은 경험적으로 안다.
정리 작업은 네 시가 되어서 끝난다. 영업 시작 전까지 아르바이트 직원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고, 카나엘은 홀로 부엌에서 요리 준비를 시작한다. 재료를 다듬고 장비 일습을 확인한다. 일류 셰프 수준의 실력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돈 받고 팔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사실, 펍을 찾아주는 손님들도 일류 셰프의 요리를 기대하고 오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말 붙일 수 있는 떠들썩한 분위기가 로열 블루스의 자랑이니까. 손님들도 그런 분위기가 좋아서 이곳을 찾는다. 알코올은 대화의 윤활유에 지나지 않는다. 가끔 윤활유가 과해 헛도는 사람도 있지만, 카나엘은 그런 예외상황을 썩 잘 다루는 편이다.
영업을 시작한다고 바로 손님이 들어오지는 않는다. 본격적으로 손님이 들어오는 것은 퇴근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런데도 오후 다섯 시부터 영업을 시작하는 까닭은, 카나엘도 알지 못한다. 그가 아르바이트 직원으로 여기 처음 왔을 때부터 영업은 오후 다섯 시부터였다. 전통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 매니저가 된 지금까지도 굳이 영업시간을 바꾸지 않는다.
손님이 가득 들어차 한창 바쁠 때쯤에, 펍의 주인 마담 로드리게스가 찾아온다. 그녀는 펍의 주인인 동시에 판월국제학교 근처 목 좋은 곳에 위치한 카페 ‘꿈꾸는 리틀피플’의 주인이기도 하다. 펍은 역사가 꽤 되었지만, 카페는 최근에 문을 열어서, 그녀는 펍의 경영 전반을 카나엘에게 맡기고 카페 쪽의 운영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그래도 금요일에는 마담을 그리워하는 단골손님들과 한잔하기 위해 펍에 온다. 이때의 마담 로드리게스는 펍의 주인인 동시에 펍의 손님이어서, 카나엘은 그녀를 대하기가 무척 어렵다.
라스트 오더는 새벽 세 시까지다. 그 주문을 처리하고 나면 카나엘의 일은 끝이다. 손님들이 완전히 빠져나가는 네 시까지 그는 부엌을 정리하고 바닥을 청소한다. 기름때를 제거하고 남은 설거지를 해치운다. 뒷정리를 마치고 나오면 가게 안에도 손님은 거의 없다. 만약 손님이 남아있다면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다.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하는데 안 가고 버티는 손님은 아직 본 적 없다.
손님이 모두 떠나면 카나엘은 아르바이트 직원들에게 가게의 뒷정리를 맡기고 집으로 향한다. 서지율에게도 가게의 열쇠가 있어서, 뒷정리 끝나면 알아서 문을 잠그고 돌아간다. 새벽 네 시 반의 판월도는 고요하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뿐. 단조롭지만 분명하게 울리는 소리.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가는 듯한 감각을 즐기며 카나엘은 집으로 돌아간다.
잠들기 전에는 뜨거운 물로 샤워한다. 그래야 하루의 고단함이 씻겨내려가니까. 씻고 나오면 대충 잠옷을 걸쳐 입고 침대에 눕는다. 그제야 여동생의 생각이 돌아온다. 아샤라 그린과 제이슨 테일러 교수도 생각난다. 이름이 같고 성이 다른 카나엘의 기억도 떠오른다. 그 모든 것이 떠오름과 동시에 매몰되어간다. 피곤함이 모든 것을 뒤엎어버린다. 카나엘은 취한듯이 잠에 빠져든다. 그의 하루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아주 조용하고 평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