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에 오른 이래로 나는 겨울마다 늘 설악산을 찾았다. 이름 없는 깊은 골짜기 어딘가에 오두막이 한 채 있었는데, 나는 거기 틀어박혀 온갖 책을 읽어대었다. 겨울 산은 밤이 길어 책 읽기에 좋았다. 따스한 벽난로의 온기와 안락한 흔들의자를 배경으로 나는 참 많은 책을 읽었다. 작가로서의 실력을 기르기 위해 주로 한국 현대 문학 소설을 읽었지만, 엔터테인먼트만을 상정한 라이트노벨과 에세이 같은 논픽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펄프 픽션 속에도 배울 점은 있었다.
나는 책을 읽다 말고 자주 단편 소설을 썼다. 원고지 20매를 넘지 않는 초박형 단편이었다. 투박한 스토리에 난해한 캐릭터로 들어차 상업성이라곤 찾을 수 없는 단편. 하지만 시험해보고 싶은 기교를 마음껏 부려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겨울밤은 길었지만 조금도 심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 숲의 낮은 짧았음에도 심심했다. 인터넷도 연결하지 않은 오두막에서 나는 별달리 할 게 없었다. 그나마 장작 패는 게 재미 붙일 수 있는 일거리였다. 밤새 벽난로를 떼다 보니 땔감은 하루에도 몇 아름씩 없어졌다. 오두막 주변의 나무는 땔감으로 쓰기 적합하지 않았기에 나는 멀리까지 돌아다녔다. 양손 가득 땔감을 들고 오두막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눈 덮인 겨울 숲을 깊게 들이쉬었다.
김훈 작가의 <내 젊은 날의 숲>을 읽고 난 다음 날 아침에도 나는 어김없이 땔감을 구하러 오두막을 나섰다. 올해 여름에 태풍이 몇 차례 지나갔는데, 그때 쓰러진 나무들이 겨우내 바싹 말라 땔감 하기 좋았다. 도끼는 묵직하여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있는 힘껏 휘두를 때마다 나무 파편이 흩날렸다.
땔감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어제 읽었던 글귀가 떠올랐다. 정확히 어떠한 글귀였는지는 다시 책을 펼쳐 일일이 찾아봐야 하는데, 글귀를 이루는 글자 하나하나는 기억나지 않아도 맥락은 머리에 남아 있었다.
나무줄기에서 영양분을 옮기는 부분은 테두리 부근의 젊은 조직에 한정되어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조직이 테두리를 형성하고, 한때 테두리였던 흔적을 나무는 제 속에 ‘테’로써 간직한다. 늘 나무줄기에서는 젊은 조직이 죽은 조직을 대체한다. 그래서 나무는 하나의 생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회에 가깝다는 게 그 단락의 요지였다.
나무의 속에서 삶과 죽음이 순환하고 있다면, 땔감은 사회의 파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부처의 모습에 가까웠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삶과 죽음의 순환에서 빠져나와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으니 그걸 부처라고 하지 않는다면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제 몸을 불살라 타인의 도움이 된다는 점도 그러했다. 예전에 병사생활할 때, 종교활동에서 만난 법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이 있는 모든 것에 부처는 있다고. 그러나 이미 죽은 땔감에조차 부처는 있었다.
슬슬 날이 풀리려는 지 노을이 아직 산마루에 걸려있었다. 이번 봄에는 봉사활동을 가볼까. 남은 길에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