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solete objective
[ Sweet Cemetery on my mind. ]
Null.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기 마련이다. 그러나 꿈을 꾸는 모두를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 에이든 A. 블레어
I.
공동묘지는 홀연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묘지 외곽을 따라 늘어선 철제 담장이 한참 녹슬어있었다. A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침 안개가 자욱하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두꺼운 쇠사슬로 문짝을 잠가두었지만 경첩이 헐거웠다. 살짝 힘을 주었을 뿐인데도 경첩은 앓는 소리를 내며 벽에서 떨어졌다. 그렇게 생긴 좁은 틈을 따라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잎을 잃은 앙상한 나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들리는 거라곤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뿐. A는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묘비의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무릎께에도 오지 못할 아주 작은 것부터 그의 키를 훌쩍 넘기는 것도 있었다. 너무 낡아 묘지의 주인을 알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비교적 최근의 것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묘비 앞에도 꽃은 없었다. 공동묘지는 버려져 있었다. 길도 모르는 묘지 안을 헤매며 묘비를 읽었다. 그녀의 묫자리는 공동묘지의 구석진 자리에서 고요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일단 가볍게 묵례했다. 그리곤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묘비를 마주했다.
묘비는 그의 앉은키와 비슷했다. 딱 눈높이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몹시 낡아 군데군데 부서져 내렸음에도 그녀의 이름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꽃은 없었다. 없는 꽃을 만들어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피어있는 꽃은 없었다. 꽃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는 피 묻은 폴딩 나이프를 묘비 앞에 두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녀의 영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A는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에서 가까운 묘비일수록 낡아 있었다. 그러나 다 부서져 가는 묘비에 새겨진 이름이 선명한 경우가 있었다. 반대로, 묘비가 멀쩡한데도 이름만 닳아 없어진 경우도 있었다. 왜 그런 차이가 나는지 그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A는 공동묘지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를 낙엽 밟는 소리가 따랐다.
거기에 A 키의 세 배는 됨직한 묘비가 있었다. 그 뒤쪽으로 묫자리는 질서정연하게 파헤쳐져 있었다. 흙이 뒤집혀있었고 6피트 깊이 아래 묫자리가 반듯했다. 넓고 높은 묘비 그 어디에도 묫자리의 주인은 명시되어있지 않았다. 이름이 닳아 없어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새겨진 이름이 없었다. 묫자리는 파헤쳐진 게 아니라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이 묫자리의 주인은 아직 죽지 않았다. 죽이지 않았다. 죽일 수 없었다. 이 묘지에 묻힌 모든 사람처럼 그렇게 쉽게 죽일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그의 손으로 죽여 이 바닥에 묻어줄 터였지만 그 언젠가가 지금은 아니다. 그때까지는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그는 뒤돌아서서 걸어온 길의 모든 묘비를 보았다.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