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early autumn
[ Autumn is the best season for reading. ]
Null.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순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순 있다.”
- 카를 바르트
I.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 대낮에도 숲 속은 음침했다. 소년은 발밑에 주의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는 바람 소리가 그의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등 뒤에 누군가가 따라붙고 있는 것 같아 무서웠다. 당장에라도 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물리적으로도 멀지만, 심리적인 부분이 더 멀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다. 소년은 준비물이 잔뜩 든 백팩을 고쳐 메었다. 그리곤 구불구불 이어진 숲길을 묵묵히 걸었다.
길 끝에는 낡고 허름한 오두막이 한 채 있었다. 그저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일 뿐인데도 어째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용기 내 문을 열자 녹슨 경첩이 괴기한 소리로 울었다. 축축하고 끈적한 악취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매우 역했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일말의 불안감을 무시하며 소년은 오두막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을 닫자 안 그래도 어둡던 실내가 칠흑처럼 캄캄해졌다. 여기라면 무슨 짓을 해도 들킬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제야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쏟아내었다.
소년은 주머니에서 가스라이터를 꺼내 불을 밝혔다. 그리곤 백팩을 벗어 준비물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피 묻은 노끈과 녹슨 단검부터 작은 뼛조각까지. 연관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는 열댓 개의 준비물을 준비하는 데 꼭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소년은 책에 쓰인 대로 준비물을 배치하고, 녹슨 단검으로 손가락 끝을 찔러 몇 방울 피를 흘렸다. 상처가 쓰라렸으나 가슴에 사무친 원한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라틴어로 적혀있는 주문의 첫 단어를 읽는 순간 라이터의 불꽃이 심하게 일렁거렸다. 더 이상 그 주문을 입에 담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해 소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시 주문을 읽기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 모를 주문을 끝까지 읽었을 때, 소년의 앞에는 반소매 티셔츠에 슬리퍼를 신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 사내는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찾아온 듯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원래부터 거기 있었지만, 주문이 장막을 걷어내고 그의 존재를 드러낸 것 같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사내의 등장에 소년은 너무 놀라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렇게 놀라면 내가 뭐가 되니. 여하튼 반갑다. 나를 부른 게 너 맞지?”
“전….”
“전은 막걸리랑 같이 먹는 게 전이고. 음, 날씨도 우중충하니 막걸리가 땡기긴 하네. 그나저나 무슨 용건이 있어서 이런 거추장스러운 의식까지 다 치렀냐?”
책에서 보았단 악마 아바돈abaddon은 이런 동네 백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위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서 소년은 진심으로 당황스러웠다. 물론 악마의 능력이 위엄으로부터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백수 꼴은 좀 너무하다.
“악마님의 이름은 아바돈 맞죠?”
“정확히 말하자면 아바돈은 내 이름이라기보다는 직책에 가깝지만, 뭐,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악마님, 제가 원하는 바가 있어 바쁘신 줄 알면서도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네가 말하고도 좀 웃기지?”
악마의 질문에 소년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런 소년에게 악마는 멋들어지게 웃어 보였다.
“그 심정 내가 잘 알지. 전대 아바돈은 간지가 철철 넘치는 사람이었거든. 이탈리안 슈트에 밤빛 구두가 잘 어울리는 남자였어. 나도 처음엔 그렇게 입어봤는데, 불편하더라고.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이런 편한 옷차림을 고수하고 있어.”
“전대 아바돈이요?”
“사람들은 악마가 무병장수한다고 생각해. 당연하지. 악마는 직책이니까. 악마라는 직책은 무병장수하지만, 그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어.”
“그 말뜻은….”
“머리가 좋네. 말끝을 흐리는 버릇은 별로 좋지 못하지만. 나는 아바돈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는 동네 백수야. 직책이 있어도 돈을 벌지는 못하니 백수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
“그럼 악마님은 사람이라는 건가요? 저처럼 평범한?”
“그건 아니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잖니. 직책이 주는 특수 스킬 같은 게 있지. 예를 들자면 아까 네 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써프라이즈하게 등장할 수도 있고.”
소년이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자신을 쳐다보자 악마는 재빨리 “흠흠, 그러니 빨리 네 용건을 털어놓아 봐. 슬슬 우결 할 시간이란 말이야.”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 소년은 몇 년 전부터 그와 그의 집안에 일어난 불우한 사건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작지 않은 기업의 사장이었다. 착실한 경영과 공격적 투자로 회사를 키워나가셨다고 한다. 그러나 경쟁 기업과의 법정공방을 시작하면서부터 소년의 아버지가 이룩한 모든 영광은 무너져내렸다. 법정의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얼마 전에는 아버지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고 했다.
“너희 아버지가 진짜 법적으로 잘못된 일을 하셨을 수도 있잖니.”
“그럴 리가 없어요. 경쟁 기업이 판사를 매수한 거라고요!”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네 입장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건 잘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건지 잘 모르겠거든?”
악마의 말에 소년은 눈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경쟁 기업의 간부들과 아버지에게 징역을 때린 그 판사를 죽여주세요!”
“맨입으로?”
“……에?”
“원래 큰일에는 큰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돈을 달라는 거죠? 그럴 줄 알고 가져왔어요.”
소년은 가방에서 검고 작은 비닐봉지를 꺼내 악마를 향해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온갖 금은보화와 오만 원 지폐가 한가득했다. 월세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악마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에 필요한 대가는 물질적인 게 아니야.”
“그럼 어떤……?”
“게임 캐릭터가 스킬을 쓸 때는 MP가 필요하지. 우리가 사용하는 스킬은 영혼이 동력이야. 즉, 이 일에 대한 대가는 네 영혼이라고. 이해가 될랑가 모르겠네.”
“그 개새끼들을 다 죽일 수 있다면 제 영혼, 까짓거 쓰셔도 좋아요.”
“거 나도 쓸 수 있다면 쓰고 싶지. 근데 네 영혼은 쓸 게 못 돼.”
“어째서요?”
뭐 그런 경우가 다 있느냐는 듯이 물어오는 소년에게 악마는 담담한 어투로 대답했다.
“네 영혼이 삐쩍 곯아있어서 써먹을 방법이 없거든. 얼마나 곯아있는지 아프리카 기아가 네 영혼을 보면 먹던 영양식을 양보할 지경이다.”
“그렇다면 저는 포기해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제 손으로 죽이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얘가 큰일 날 소릴 하네. 요즘 사람 죽이면 최소 7년 징역이라는 거 모르냐? 7년 동안 웹툰을 못 본다니까? 그 얼마나 지옥같은 삶이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알려줘요.”
“영혼이 곯아서 못써먹는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냐? 살찌우면 그만이잖아.”
“어떻게 하면 살찌울 수 있는데요.”
“책을 읽어, 책을!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악마는 정말로 짜증이 치솟았는지 속사포 랩이라도 하듯 작가의 이름과 책의 제목을 쏟아내었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는 읽어본 적 있냐? 존 톨킨의 후린의 아이들The Children of Hurin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Lolita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은? 맙소사,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Animal farm은 읽어봤겠지.”
침울한 표정으로 말 없이 고개를 젓는 소년을 향해 악마는 “그렇다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Die Verwandlung은 읽어봤을 리가 없지. 그 재미있는 소설을….”이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여튼 그거 읽으면 그 개자식들 다 죽여줄 수 있는 거죠?”
“대사가 매우 요상하다만,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네 영혼이 충분히 살찌울 정도의 독서량이라면 10년도 모자라겠지만.”
“상관없어요. 앞으로 죽어라고 책만 읽을 거니까. 대신 나중에 말을 바꾸면 나는 정말 악마님을 죽여버릴 거예요.”
“사내가 불알 두 쪽 달렸으면 하늘이 무너져도 입 밖으로 낸 말은 지켜야지.”
그럼 고자는 한 입으로 두말 해도 되는 건가? 소년은 궁금했지만,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악마는 모습을 감추었다. 소란스러운 바람이 숲 속을 몰아가는 가운데 소년은 낡아빠진 오두막에 홀로 남겨졌다. 그러나 남겨진 소년은 남겨지기 전의 소년과는 분명 달랐다. 달라졌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 나뒹구는 잡동사니를 가방에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