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밤
공장지대 한복판의 편의점 야간 알바는 보통의 야간 편의점보다도 곱절은 여유롭다. 자정 넘어서 공장 야간조 쉬는 시간이 되면 반짝 바빠지지만 그뿐이다. 아침에 물건 들어오기 전까지 한 시간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손님을 기다리면서 나는 책을 읽는다. 그날 집에서 가져온 책은 장강명이었다. 남북이 화해 분위기인 상태에서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라니 책 제목도 이 정도면 걸작이라 하겠다.
새카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 나는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서 홍차를 호로록 음미한다. 돈 받고 책을 읽는다 생각하면 무슨 책이든 재미있게 못 읽으랴마는. 이 책은 그것과 별개로 재미있어서 홍차가 금방금방 바닥을 드러었다. 가끔씩 담배 사러온 손님 말고는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다.
물론 그 날은 좀 달랐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책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자 직감은 빠르게 확신으로 바뀌었다. 취하다 못해 죽어버린 듯한 남성. 넥타이는 왼손에 금방이라도 놓칠 듯 들고 있고, 셔츠의 단추는 위에서부터 몇 개가 풀어진 채로 나를 향해 걸어왔다. 갈지자 걸음이라고 하기도 뭣한 이상한 걸음걸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의 나이를 쉽게 짐작해내는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겠으나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대략 50대 중후반이 아닐까 어렴풋이 추측할 뿐. 그 나이대의 남성이 그러하듯 사내도 극심한 사막화 현상을 겪고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시작된 사막화는 정수리를 향해 숨 가쁘게 내달리고 있는 듯 보인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칼로도 사내는 훌륭한 2:8 가르마를 구사하였다. 그게 가능하다니 보는 사람으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머리카락 틈새로 정수리까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 담배 좀 줘 봐.” 사내가 흐릿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딱 한 마디 했는데 이렇게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들 수 있다니! 나는 가르마에 이어 또 한 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음속에서 오만가지 욕지거리가 들솟았다. 그렇지만 서비스직 아르바이트생은 모름지기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무슨 담배 드릴까요?”
“야 거 담배 달라고 하면 당연히 더원블루지 뭐 그런 걸 꼬치꼬치 물어보고 있냐.” 사내가 다시 한번 좆같이 굴었다.
아무리 니가 좆같이 굴더라도 니 꼬치를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같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걸 겨우 삼켰다. 알바가 손님과 싸워봤자 득 될 게 없다. 그냥 얼른 해결하고 내보내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계산했다. 사내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어 포스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오오, 부처님 제발. 저의 인내력은 곧 끝난단 말입니다. 이대로 저를 번뇌케 하시면 이 손놈 죽이고 구천을 떠돌겠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며 겨우겨우 계산을 끝마쳤다. 사내는 요즘 알바 어쩌고저쩌고 웅앵웅 쵸키포키거리면서 카드를 받고 돌아갔다.
액땜한 셈 치기로 했다. 올해 초에는 유난히 운이 좋았으니까. 나는 한숨 푹푹 내쉬며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다시금 문이 벌컥 열렸다. 설마설마했으나 예상은 조금도 빗나감 없이 들어맞았다.
“야, 라이터도 줘봐.”
“라이터는 어떤 거로 드릴까요?”
“거 아무거나 줘. 라이터도 골라야 하냐.”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나는 가장 싼 400원짜리 라이터 바코드를 찍었다.
“야, 근데 너 노무현 대통령 어떻게 생각하냐.”
겁나 뜬금 없어서 더욱 충격적인 대사였다. 도대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 무슨 근거로 아니 그보다 도대체 뭐지. 편의점 야간 빌런 중 가장 괴악하다는 일베중년 빌런과 만취 빌런의 파이널 퓨전이라니. 세에에에에에상에에.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 이 엿같은 상황 한 번 모면하자고 노무현 대통령님을 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좋은 분이었다고 이야기하면 이 일베중년 빌런은 한 시간은 박혀서 지랄할 게 뻔하다. 내가 타임스톤을 가진 것도 아닌데 머릿속에서는 질문 하나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가능성이 가지의 가지의 곁가지를 펼치면서…….
사내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던지듯이 꺼내었다.
지폐 한 장.
1장
“마, 노무현 대통령님만큼 좋은 분이 없었따. 이번 선거는 1번이다 알았나.”
“네, 거스름돈 구천육백 원입니다.”
“무슨 거시름돈이고. 팁이다 가지라,”
아아 역시 이번 지방 선거는 기호 1번인 거야. 더불어 사는 사회, 더불어 민주당.
덧붙이는 말
이 작품은 100% 실화입니다만 여전히 소설이기도 합니다. 제가 겪은 일이 아니었기에 커다란 맥락만을 따랐을 뿐, 세부적인 디테일은 제가 알바하고 있는 매장을 떠올리며 적었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는 한 점 거짓 없이 쓰여졌습니다. 이렇게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게 진짜 저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만큼 비현실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쿵 저러쿵 해도 제가 이 사건을 통해 여러분께 전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 뿐입니다.
이번 지방 선거는 기호 1번입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 더불어 민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