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 출사표
어느 여름날, 죽음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자네는 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명이 다했으니 인제 그만 나를 따라오시게.”
나는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세 캔째를 다 비워가고 있었기에 정신이 아주 말짱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세상 무엇과도 닮은 점이 없었으며, 그러한 사실 자체가 그것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밟고 서 있는 공간이 죽어가고 있었으므로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행동에 옮겼다.
“저 아직 젊어요. 아직 죽긴 이르단 말이에요!!” 나는 있는 눈물 없는 콧물 쭉쭉 뽑아내며 죽음의 바짓단(으로 여겨지는 부분)을 붙잡고서 사정사정 통사정을 했다. 나처럼 간도 쓸개도 없는 인간을 처음 보았는지 죽음은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이… 이거 놓으시게. 이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그것은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바짓단을 놓아주지 않았다. 대머리 독재자는 불멸할 것처럼 장수하는데, 세상 착하게 살아온 내가 이리 젊은 나이에 죽을 수는 없었다. 결국 나의 땡깡을 버티지 못한 죽음이 한마디 했다.
“후우,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네만….”
“그 방법이 뭐죠!! ‘부모님의 목숨을 바쳐라’ 같은 거만 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목숨은 개개인의 것이라 타인의 목숨으로 자신의 목숨을 대신할 수는 없네. 다만, 자네의 목숨으로 자네의 목숨을 연장할 수는 있지.” 죽음은 영 아리송한 소리를 하는 데 도가 튼 존재였다.
“죽기 싫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 같은데요, 그거.”
“그렇지 않다네. 자네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게 주어야 한다는 뜻이지.”
“오, 생각보다 별 거 없네요. 정말 그거만 드리면 저 안 죽어도 되는 거예요?” 말하면서 나는 생각해보았다. 내가 가진 것 중에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 뭐가 있을까. 스스로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도 뭣하지만, 나는 평소에 씀씀이가 검소하고 사치품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다. 가진 것도 적어서 그 중에 뭐가 사라진다 해도 크게 타격을 받을 것같지는 않았다. 고작 그것만으로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면 나는 몇 개 더 얹어줄 용의도 있었다.
“그러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게 주고 난 후로, 자네는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을 걸세. 그래도 괜찮다면 받아가도록 하겠네.” 그것은 죽음의 최후 통첩이었다.
“그것이 제 소유가 확실하다면, 뭐든 가져가세요!” 하고 나는 꿈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아 시발 꿈’하고 생각이 들었다. 꿈 치고는 드물게 희한한 꿈이었다. 나는 원래 꿈을 잘 안 꾸는 성격인데, 그래서 가끔씩 꾸는 꿈이 상당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나는 아직도 초등학생 때의 꿈을 기억한다.
이런 뒷맛 더러운 꿈을 앞으로 몇 년이나 기억하게 될 것이다. 덕분에 나는 기분이 무척 우울했다. 거기에 얹어서 지난 밤의 숙취로 머리까지 지끈거린다. 그렇지만 침대에서 꿈지럭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나는 늘어지게 한숨 쉬고 침대를 빠져나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나의 하루는 단순하다. 옷을 입고 편의점으로 알바하러 다녀온 다음, 퇴근하면서 사 온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자고 일어나면 그러한 나날이 다시금 반복된다. 휴학을 신청한 12월 이후로 나는 반년 동안 그러한 루틴을 충실하게 지켜왔다. 하루도 쉬지 않는 노동은 통장에 잔고를 쌓아주었고, 습관적인 음주는 간에 지방을 쌓아주었으며, 매일 같은 독서는 내 영혼을 살찌웠다.
그러나 휴학한 이후로 노동과 음주와 독서에 치여 바쁘게 살아온 나머지 나는 글쓰기를 소홀히 여겼다. 소홀히 여겨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십몇 년 동안 꾸준하게 글을 써 왔고, 그러한 관성이 고작 한 번의 안식년으로 싹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펜을 잡으면 언제라도 글을 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근거는 없었으나 경험적으로 알았다. 그리고 나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가을 끝 무렵에 소설을 써보기로 생각했다. 정말 오랫동안 글을 놓고 있었지만, 그동안 틈틈이 책을 읽어왔으니 감이 떨어졌다 해도 금방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의 판단은 오만의 소치였다.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뭔가가 쓰여지기는 했으나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았다. 분명 나의 글에도 반짝이는 무언가가 존재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 개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알아 온 형님들도 나의 글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답답했다. 숨구멍 어딘가에 골프공 같은 게 자리하기라도 한 듯이. 이비인후과에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내 몸은 멀쩡했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을 때는 조금도 답답하지 않았다. 오로지 새하얀 화면에 키보드를 두드릴 때만 숨이 막힐 뿐이었다. Writer’s Block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나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 것도,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시킬 지 모르겠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내가 쓴 글이 정말 싫었을 뿐이다. 너무 재미가 없고 판에 박은 문장의 나열이라 심지어 구린내가 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제야 나는 초여름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것은 꿈이 아닐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스물 몇 살의 나이로 죽어야 할 팔자였던 것이다. 그날 밤에 나를 찾아온 죽음은 정말로 죽음이었고, 그는 약속한대로 내게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가져가버렸다. 내가 정해놓은 제한도 확실히 지키고서 가져갔다.
“그것이 제 소유가 확실하다면, 뭐든 가져가세요!” 라고 나는 이야기했고, 글을 쓰는 능력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롯이 나만의 것이었으므로, 여기에는 어떠한 반론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김앤장의 변호사들이라도 이건 지는 싸움이라고 나를 안 받아줄 터였다.
소설 따위 아무래도 좋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한 해를 통채로 날려먹고 나서야 나는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 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는 BornWriter였던 것이다. 글을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고, 스스로의 글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미쳐버리고 말, 정말로 뼛속까지 글쟁이로 점철된 인간이 나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내게 주고 난 후로, 자네는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을 걸세.” 라고 죽음이 내게 분명히 경고했었다. 그것이 경고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내게서 문학을 거세하자 나는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나는 아파트 옥상의 끝자락에서 유언 // 출사표를 적는다. 죽음이 내게서 소중한 것을 가져갔으므로, 그것을 돌려줄 존재 또한 죽음 뿐일 것이다. 나는 죽음과 마주하여 소중한 것을 되찾아오겠다.
덧붙이는 말
이것은 유서이면서 동시에 출사표입니다. 정확히 1년 반 동안 제대로 된 소설을 무엇 하나 써내지 못한 스스로를 죽여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글을 쓰겠어요.